이곳이 터인가. 데스브링거는 그나마 쑥대밭 꼴은 면한 폐허를 바라보았다.
지붕은 반쯤 무너져 있었고, 술집과 술집 사이에 낀 건물은 그 블록 째로 응징 당한 듯 몰골이 추레했다. 무너진 틈으로 보이는 내부도 꼴이 가관이었는데, 작정하고 안에 숨겨진 온갖 집기며 술이며 정보를 뜯어갈 기세로 헤집어 놓은 게 훤히 보였다.
이 정도면 보통 사람들은 완전히 건질 것도 없는 폐건물이군, 하고 넘어갈 것이다. 그러나 데스브링거는 저와 함께 온 자들이 척척 앞서 걸어가는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갔다.
지하실, 혹은 이곳과 연결된 다른 보관소.
정보를 손에 다루는 자들이 비상 시에 빼돌려 놓을 공간을 하나라도 안 만들어 놓겠느냐고.
데스브링거는 배신자가 존재하는 시점에서 분명하게 그런 공간이 있을 것이라 직감했다. 정보꾼들은 둘 줄 하나이기 때문이다. 정보를 모두 날려 자기 자신마저 절명하거나, 혹은 이미 뒷일을 예비하여 공작을 완료했거나. 배신자는 곧 생존자다. 그렇다는 건, 전자가 아니라 후자라는 뜻이다.
세상에서 가장 약삭빠르고 얄밉게 사는 자들은 첫째로 저 머리 꼭대기에 사는 것들이고 둘째로 발 밑에서 개미인 척 숨어 지내는 독사들이다. 뒷골목에 사는 자들의 영리함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개미인 척하는 뱀이고 쥐새끼인 척하는 살쾡이였으니까.
터벅, 발을 들일 적에 삐걱이는 소리를 세밀히 귀기울여 들어 본다. 그 중 하나라도 부자연스럽다면 거기가 정답지일 터다.
끼익.
유령선이 숨쉬는 소리와 비슷하다. 낡은 바닥이, 너가 찾는 보물이 여기 있다 소리 치고 있었다. 데스브링거는 아직 멀리 떨어진 채이나 이곳에 날개 접고 숨죽여 있던 자들은 모두 그 소리를 주목했다.
거기구나. 한 달음에 성큼 달려온 그는 케이프도 휘날리지 않은 채 단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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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 년 전 이야기이다.
진주조개의 절반이 죽고, 바다를 돌아다니던 고래들이 해변에 드러누워 썩어가고 있었다. 징조라고 할 무엇 하나도, 바다는 인간들에게 전한 바 없었다. 하여 그 누구도 이 현상의 이유를 몰라, 다만 바다께서 노하신 것이라 할 뿐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고래의 몸에서는 낙뢰가 꽂히는 소리가 퍽, 잔인하게도 났다. 바다에 삶이 걸려 있는 해안가 사람들은 그걸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죽은 살이 터져 나가는 소리. 뭣도 모르고 가까이 갔다가 해 입는 소리. 고래들의 유해에 항구가 막혀 배가 나가지 못하는 불만소리. 닻의 사슬이 녹슬기 싫어 안달 나 있는 소리.
모든 소리는 파도에 묻혔다. 사람들의 비탄도, 생명의 죽음도. 서서히 말라 죽으라는 듯이. 바다가 도시를 버렸다. 바다께서 우리를 버리신 거야. 진주조개에 너무 눈이 멀어 버린 거라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런 말 외에는 달리 무엇 하나 돌지도 않았다.
어렵사리 배가 출항한다 한들 들어올 때가 더욱 문제였다. 고래들의 시체는 날로 쌓여 갔고, 저걸 치울 인력은 배 위에서 조각배로 천천히 들어오다 고래 시체가 유폭되며 휩쓸리거나, 그 공포에 사로잡혀 숨어 버렸거나.
항구 도시는 그렇게 메말라 갔다. 물과 가장 인접한 도시는 인간의 눈물로 빚은 염전이 되기 직전이었다. 어찌 보면 그건 천벌일 지도 몰랐다.
분명 다들 그렇게 메말라 죽는 것 만을 상상하며 하루 하루를 보냈을 터다.
이야기와 기록에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존재 하나가 명시되어 있었다.
터지지, 그렇지 않을지 노심초사하는 인간들 사이를 거침없이 비집고 헤쳐 나가, 도로 그 시체들을 하나하나 바다에 밀어 넣어 둥둥 띄워 버리는 존재.
그 사람은 처음 봤을 때부터 잔뜩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울고 싶지 않아서 얼굴을 찌푸린 아이와 비슷한 표정이라고 해도 괜찮았겠다. 그는 그렇게, 고래들의 시체를 바다에 띄워 버리며 도시에 나타났다.
바다에, 고래들을 장사 지내면서.
그 존재는 얼마 안 가 마을에 있는 몇몇 사람들의 머리채를 잡고 윽박을 지르기 시작했다. 배를 대령하라는 소리, 진주와 용연향을 팔아먹은 대가를 치르라는 소리, 골통과 뼈로 부적을 만들어 버리겠다는 저주와 같은 울부짖음. 그가 끌고 온 사람들은 모두 벼락부자가 된 도박쟁이들이었다.
고래 시체가 유폭할 위험에서 벗어난 도시는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그 존재는 무언가에 화가 난 듯, 생명력 넘치는 도시의 분위기를 걸음하는 곳마다 족족 살기로 뒤바꾸곤 하였다. 그에게 무어라 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았겠지만, 고래를 한 팔로 바다에 밀어 넣는 인간에게 깝죽거리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한 소문은 짧은 시간에 많이 만들어졌지만, 이 세대까지 흘러오지 못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거품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왜냐하면 그는 이도 저도 안 되는 것을 알자마자 어느 배 한 척의 조각배를 탈취해 바다 너머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시를 휩쓸어버린 작은 폭풍과도 같은 존재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타고 갔던 배가 항구에 닿았을 때는 해적들로 추청되는 인간들의 목만 수십 여 개가 떠밀리듯 도착해 있을 뿐이었다. 기름 냄새가 났다. 불태워 버리고 싶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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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전부입니까?”
“내가 알기로는 이게 전부입니다. 전해 들은 이야기인 데다가, 소문이 정말 훅 꺼져서.”
인퀴지터는 약간의 낭패감을 느꼈다. 그녀가 지금껏 선교 활동을 해 온 마을에 흔히 있는, 마을을 세운 사람에 대한 전설이나 혹은 마을 영웅 이야기와 하등 다를 바 없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나서, 마을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는, 갑작스럽게 사라져 그 이후의 일을 아무도 모른다. 전설이라고 하기에는 동화로 불러도 괜찮을 정도로 행적이 간결하였으며, 이렇게 구전되어 내려 오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될 정도로 도시에 머문 기간이 짧아 보였다.
외려 그 짧은 기간동안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가 궁금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바다 너머로 사라졌고, 이 이야기는 이백 년 전의 세월을 넘어 그녀에게 도착했다. 시간의 수평선은 영원히 평행하여 그녀에게 교차될 일이 없을 것이었다. 아득함 속에 느낀 감상이란 그랬다.
“해적의 목이라면, 그 때도 해적이 있었다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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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의 목 수십 여 개. 데스브링거는 이 수상한 존재가 해적을 겨냥하고 이런 일을 벌였으리라 직감한다. 화가 난 듯한 얼굴에, 분노를 참지 못하는 행동이 여럿 서술되어 있었다. 이건 필시 분노 어린 사람의 복수에 찬, 뒤가 없는 짓거리다. 복수귀는 이 갈 곳 잃은 분노를 아주 잘 안다.
그걸 기어코 해낸 작자는 그럼 이후에 어떻게 되었지? 오래 전 소문을 모아 놓은 문헌이라, 취득할 수 있는 정보는 여기에서 멈춘다. 그마저도 정리본인지라 이걸 손수 엮은 인간의 입이라도 다시 열어 젖혀 뭘 듣고 뭘 본 거냐고 묻고 싶은 심경이었다.
이 틈바구니에서 삭제된 이야기가 무엇일까.
“데스브링거, 제가 해적들 틈바구니에 있으면서 알게 된 건데.”
“뭐야.”
“…그 자들, 바다로 나가는 걸 꺼려하고 있습니다.”
“바다로?”
그럼 그 자들은 진주조개를 노리는 것이 아니다. 바다로 나가 조개를 독점하여 도시 사람들을 본격적으로 핍박하고 못살게 군다거나, 성주를 살살 꼬드겨 한 패가 된 후에 도시 사람들 전부를 지저분한 뒷골목으로 내몰거나.
그런 일이, 생각해 보니, 일어나지 않았다. 암녹색 눈의 동공이 순간 좁아졌다. 대체 왜?
이곳은 해적들에게 납치된 지 얼마 안 된 도시가 아니다. 사안이 사안이라 사제가 파견된 것도, 그가 어떻게든 이곳에 득달같이 달려 든 것도, 회복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있어서이지 적장의 목을 모조리 치고 오라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데스브링거는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 자신은 있었다만.)
생각할수록 더 이상했다. 등대가 있는 절벽 아래에 추가로 정박한 배들. 그 배들을 불법 상선마냥 운영할 수도 있지 않나? 그런데 왜 정박이 되어 있었지? 배가 노는 것을 좋아하나? 해적이나 되어서 게을러 빠진 거냐?
“여기, 편집 이전본이 있는데요.”
“줘 봐.”
아, 드디어. 데스브링거는 오래 된 종이와 잉크에서 나오는 희미하고 달콤한 날것의 또다른 정보를 맡는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핸드벨 소리처럼 그 공간을 명랑하게 채웠고, 이윽고 그는 종이 무더기를 가볍게 덮는다.
그 무엇보다 확실한 특징 하나가 적혀 있었다. 이곳의 정보 취합 및 편집 담당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축약 방식을 잘못 정했다.
오른편은 검고, 왼편은 은색인 머리카락.
그가 물안개 속에서 또렷하게 본 특징이다. 유령선의 유일한 탑승객, 그의 머리다.
이건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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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겠지요. 가장 거대한 배 이야기를 하셨었죠, 그러고 보니.”
거대한 배? 차라리 이 쪽이 조금 더 흥미가 붙는다. 분명 등대지기의 증언으로는 배의 크기가 등대를 우습게 볼 정도로 커다란 인상이었지. 집중하여 듣고자 다시 자세를 고치니, 노파는 별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손사레를 친다. 가만 생각하는 잠깐의 침묵 이후, 노파의 주름진 입가가 드디어 말문을 다시 연다.
“배의 이름이 뭐였더라. 아, 맞아.”
그리고 인퀴지터는 튀어나온 이름에 순간 말을 잇지 못한다.
그 배의 이름은, 신전에서 금기시하는 기록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불경한 이름이었으므로.
그건 대악마의 이름이었다. 혹은 별칭, 혹은 바쳐진 그릇의 이름.
이 바다에 악마가 산다.
하늘에 물고기떼 같은 낮은 뭉게구름이 몰려 있다.
비가 몰려올 것 같은 하늘이다. 인퀴지터는 성 안의 창문을 보며, 눅눅해진 깃펜을 잘 갈무리한다. 바다 냄새가 잘 배인 갈매기 깃털은 회색빛 끝을 팔랑거리며, 펜대를 잡은 주인의 말을 유려하게 새긴다.
사안이 사안이다. 대악마의 이름이 한 때 도시 앞 해안에 둥실, 당당히 떠 있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오직 도시만이 품고 있었으며 그 마저도 시간 속에 사라져 가고 있었다. 진주조개를 꼭 닮은 이 도시는 그런 중요한 사실을 오랫동안 앙다문 채 내어 놓질 않다가, 끝내 그녀가 진흙 무더기를 헤치고 도시가 품은 진주를 손에 쥐어서야 속살거린다.
이 사건은 우리가 몰랐던 어떤 음모에 걸쳐 있을지도 모르고, 그 음모가 이미 해결되었는지 진행 중인지도 모릅니다. 종이라는 하얀 배를 가르는 검은 잉크가 마지막 온점을 찍어 선착장에 도착한다. 그녀가 해결할 수 있는가? 모르겠다. 불가능과 부정적인 생각은 굳이 종이에 적지 않았다. 이 종이의 이름은 희망이어야 하기 때문에.
데스브링거는 등대 바로 밑, 절벽 근처의 얕은 해안을 마저 탐사하고 돌아왔다. 날랜 몸짓은 그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으며 왜 그런 이명을 받았는지 또 한 번 깨닫게 하곤 한다.
정보를 각자 취득하고 서로 만나 교류하는 것 이상으로, 중대함 하나가 뇌리에 스쳐 지나간 청년들이었다. 그들에겐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누군가가 긴급히 서신을 육로로 보낼 지 말 지 고민하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불법 선박이 얼마나 오랫동안 정박해 있었는지 알아내고자 하였다.
그 결과는 그러니까, 좀 많이 머리가 아팠다. 저건 살아있는 난파선이었다. 파도와 암초에 쥐여 뜯긴 자국이 선명했고, 그걸 급하게 수리하고도 떠나질 못 하여 물기가 말라 소금과 모래만 얼룩진 형체가 쓸 데 없이 음산했다. 근처에 분명 사람들이 판잣집을 살고 있었는데도.
이 이상 무언가를 더 확인해야 하나. 아무래도 그 유령선은 해적들만 집요하게 노리는, 바다의 전령일 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해적들을 모두 바다로 내몰아 버리면 이 도시는 자연스럽게 해방될 것이다.
그 사람들이 도시로 도망쳐 온 것? 정황상 이 도시의 소문을 듣고 오다가 험한 꼴을 당한 것이겠지. 그는 아직도 제 품 안에서 바다의 차가움을 내뿜는 흑진주를 상기했다. 등대지기의 얼굴이 막연히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등대지기의 이야기 속의 유령선이 그 날과 겹친다.
이쯤 들쑤셨다면 할 일은 정해져 있는데, 샌님의 얼굴 표정이 심상치 않다. 대낮에 태양은 유일해야 한답시고, 인간 햇볕 되는 사람이 구름이 우중충히 껴서 어둑한 낯을 보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정보를 들은 거야? 정보를 손으로 다루는 업은 이럴 때 영혼부터 슬그머니 꿈틀댔다.
“무슨 일이에요?”
“…어쩌면 악마가 일에 관여했을 지도 모른다.”
“뭐, 네?”
“악마숭배자 일당이 있을 지도 모르고.”
여긴 신전의 세가 약하니까, 터를 잡기 좋았겠지. 그럴싸한 가설이지만 결정적인 하나가 부족했다. 데스브링거는 아무리 그래도, 라는 말을 줄이기로 했다. 세상은 생각보다 해괴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예상은 가볍게 뛰어넘는 것이 바로 그들이 사는 현실이었다.
“이백 년 전, 이 도시 앞바다에 대악마의 이름을 딴 배가 있었다는 증언이다.”
그러니까 바로 이런 일 말이다. 상황이 순식간에 아득히 복잡해져 가는 게 느껴졌다. 그럼 이 샌님은 해적이 문제가 아니라 악마숭배자가 문제가 된 상태고. 데스브링거, 그의 상황은 어떠한가?
그의 일은 이미 모두 마쳤다. 정보 길드의 일원들을 해적에게서 빼내는 일, 그 과정에서 배신자 또한 처단하였으며, 길드 내의 정보 복구를 돕기도 하였다. 추가적으로 이 사제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가 원래 머물며 했어야 할 일보다 충분히 더 많이 일한 셈이다.
흑진주가 묻는다. 발을 뺄 것이냐고. 너는 한 배를 탔는가.
“저 좀 어지러운데요.”
“어디 아픈가? 일사병일 수도 있다. 그늘에서 쉬어라. 아니, 신성력으로 치료를,”
“그거 말고요.”
나는 이미 노를 잡고 키를 움직이고 있지 않나? 시선을 채 마주하지 못하며, 그는 입에서 진주알같은 고운 말을 이로 으깨 뱉는다. 늘 하는 일이다.
“댁은 어쩔 건데요.”
“…신전에 일단 도움을 구해 볼 생각이다. 어쩌면 그 유령선이 악마일 지도 모르니까.”
아니면 이 대화에서 노를 넘겨 주어야 하나?
두 녹색 눈이 성벽의 그림자 속에 마주한다. 한 쌍은 그림자에 파묻혀 안 그래도 어둑한 숲의 빛이 더욱 짙어 졌고, 다른 한 쌍은 뭉게구름의 틈바구니로 내리쬐는 빛이 쏘여 더욱 반짝였다.
“잠깐, 유령선이랑 그 위에 있는 탑승객이 악마라고 생각해요?”
이건 스스로에 대한 시험이다. 같이 저을 것인가, 아니면 떠넘기고 갈 것인가. 오래 전에 뭉툭해졌다고 생각한 양심을 저 인간이 늘 세모꼴로 갈고 닦게 만드니 이러는 거라고,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속으로 늘어 놓는다.
그는 어쩌면 이야기 속의 복수귀에게 홀리고 그날 본 망령에게 시선이 빼앗겼을 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게도 그 또한 복수로 인해 새로 태어났으니. 비죽 웃는 꼴을 저 사제에게 보이지 않아 참 다행이다.
사제는 그 말에 입을 어물거린다. 도적의 표정을 면밀히 살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성벽의 그림자에 휘감긴 채였으므로.
그것이 참으로 이질적이라고 느낀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의 형체가 전부 드러난 한낮의 거리였기 때문에, 어둠에 숨어 사는 이임을 알고 있음에도 늘 모습을 약속하지도 않은 장소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설령 어둠 속에 있더라도 서투를 지언정 합을 맞췄기 때문에.
저 또한 그 어둠에 함께 하여 빛을 밝혔지, 이렇게 갈리지는 않았으니까. 그녀는 맨 처음을 돌이킨다. 도적 녀석이 도망가지 않았다고 안심하며 냉큼 순순히 마저 일을 맡겼던 순간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발 밑을 본다. 갈매기 깃털이 오늘도 흰 비둘기를 대신해 깃털을 날린다. 깃털의 비가 살랑거리며 그림자와 빛의 사이를 더듬는다. 회색빛 깃털 끝이 보였다.
“악마, 가 관련된 사건일 수도 있다. 일단은.”
솜털이 목을 간지럽히는 느낌에 헛기침을 한다. 푸드덕, 갈매기들은 타종 없이 그저 새로운 앉을 곳을 찾아 날아가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새들을 시선에 두며 인퀴지터는 이어 말했다. 그림자 속에 묻힌 사람의 눈을 달리 바라볼 방안이 없는 탓이다.
“흑진주를 잠깐 볼 수 있나?”
“정화라도 해 보려고요?”
날카로운 목소리였나? 그렇지는 않았다. 도적은 차분하게 그의 품 안에서 곱게 싸인 천조각을 내밀고 있었다. 순순한 태도에 사제는 조금은 당황하며, 흑진주를 받아든다.
“만약 마기가 느껴졌으면, 보여 드렸을 때 반응하지 않았겠냐고요, 그 때.”
“그렇지.”
제법 냉정한 말이며 사실이기도 했다. 그녀는 사제였고 이런 마기를 잡아내는 데에 가장 예민한 감각을 가진 직종에 몸 담은 자였다. 부정이 일어난 흉흉한 물건이었다면 진작에 반응이 일어났어야 했다.
“어때요?”
“…없군.”
“그럼 일단 범위를 축소시킬 수 있겠군요?”
도적은, 자신이 가진 노를 다시 가져간다.
흑진주는 정말로 묻는다. 계속 항해할 것이냐고. 아무렴, 악마라는 종자들은 악마만큼이나 추악한데. 그걸 직접 썰어 제낄 만한 힘은 모자랐지만, 혹여 무고한 인간이 나오지 않게끔 영점을 조절하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요는 이렇다. 만일 유령선 위의 탑승객이 악마와 관련된 자라면, 이 도시 전부가 다시 한번 폐사할 것이다. 그러니 조금 더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데스브링거는 사제에게 요약하여 전달하였고 사제는 제 보고서를 전할 지 말 지에 대한 결단을 내렸다.
“그럼 내용을 수정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보낼 거에요?”
기실 도적은 신전 사람들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인지라, 그의 반응은 유별난 것이 없었다. 사제에게는 그리 다가왔겠지만 말이다.
“안 되나? 하지만 부상자도 많고, 이번 사안은 악마가 관련되어 있음이 확실한데도?”
배의 이름이 그 따위만 아니었어도 신전의 높으신 분들이 더 늘어나는 꼬라지나 보라며 속으로 비꼬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마따나 사안의 상태가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말 그대로 도박판에 걸듯 해야 할 지도 몰랐다.
올곧은 타당함이다. 너무 오랜만에, 어쩌면 거의 처음으로 보는 타당함이라 그는 끝내 이마를 짚었다.
“하루만 미뤄 봐요. 그 동안 뭐라도 찾아 보자고요.”
“하루 정도면, 괜찮겠군.”
사건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두 사람은 드잡이질보다 협상이 더 낫다는 사실을 이미 깨달은 이들이다. 바다에 나온 신출내기 어린 선원이던 시절은 조금 지난 두 사람이 비로소 다시 눈을 맞춘다.
도적이 마침내 그림자에서 나온다. 그녀보다 더 선명하고 더 짙은 녹안이, 조금 불퉁한 얼굴 속에서 햇빛에 반짝인다.
“그럼 악마숭배자가 어떻게 걸쳐 있는지 탐문 수색하러 가 볼까요? 샌님?”
갈매기 깃털은 흰색과 회색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가 걸어 나오며 어지럽힌 것 몇 개, 그녀가 다가서려다 머뭇거리며 흩어진 것 몇 개. 하늘에 널부러졌던 물고기떼를 흉내 낸 구름은 갈매기에게 잡아 먹혀 저 뒤로 흘러간 채다.
-
수색이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인퀴지터의 신성이, 흩어진 구름이 내몰려 웅크린 어두컴컴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낮에 어둠이 몰려 있는 곳. 하늘의 배들이 선착하여 그림자의 닻을 내린 곳. 불길함이 터를 막 잡기 시작한 곳으로, 사제는 도적의 팔목을 억세게 쥐고 뛰기 시작했다. 도적의 눈에는 그저 비가 막 내리기 직전의 하늘로 보였으나, 신성을 다루는 이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젠 도적에게도 아니게 변하기 시작한다. 가까이 갈수록, 시체에게서 올라오는 시독과 사기가 공기에 은은하게 번지는 게 느껴졌다. 데스브링거에게는 가장 익숙한 냄새이고 기척이다. 죽은 자의 싸늘함, 영혼 없이 내버려진 고깃덩이의 부피감과 무게감, 유독한 악취.
어제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던 흔적이다. 단언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속인 적도 없었고 무언가를 숨긴 적도 없었다. 흔적을 살피면, 이건,
“이 인간들 방금 막 떠내려 온 거잖아?!”
그건 인퀴지터도 알 수 있었다. 이 뺀질이가 저를 속이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 인간들이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도. 반파된 배의 조각들에선 아직도 모래를 적실 물이 척척하게 새고 있었으며, 널려 있는 인간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생생했다. 모래 해변을 굴러 가는 저 인간이 살아 있나, 죽어 있나는 확인한 자만이 알 것이다. 그 정도로 해변은 난잡했다.
그렇다면 죽은 자의 냄새는 대체 어디서 나는가? 사제는 제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고, 도적은 바다에 와서 비린내 때문에 쓸 것이라 여겼지 이렇게 쓰리라고 상상도 못 한 제 케이프의 목덜미 부분을 잡아당겼다.
부패한 냄새가 부서진 배에서부터 나고 있었다. 거기에 무엇이 있을지 달리 상상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러기도 전에 두 사람을 발견한 인류의 배반자들이 먼저 그들에게 반응을 요구했다. 그것도 아주 격렬한 반응을.
“누구, 누구냐!”
“사제다! 빌어먹을!”
바꿔 말하자면 저 치들도 똑같이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인퀴지터는 이곳이 방금 막 비상 정박한 악마숭배자들의 은신처(곧 그렇게 될 예정인 곳)임을 알자마자, 그녀의 몸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작열통에 더는 미간을 찌푸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그녀는, 제 할 일에 숙련된 사제였다.
신성이 해변을 덮는다. 금빛 파도가 육지로 이주한 바다의 괴물들을 맞이한다. 인두겁을 쓴 망측한 족속들을 친히 맞이한다. 해양의 거절에 흠씬 두들겨 맞고 온 지리멸렬한 존재들에게, 인간이며 신의 대리자인 동시에 육지에 선 존재로서의 모든 거절을 행한다.
악마를 숭배하는, 인간에게 악이라 규정된 영혼들이 황금빛 잔물결에 휩쓸린다. 그러나 그 자들도 마냥 이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보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물결 치는 정화의 힘을 꾸역꾸역 뿌리친, 영혼부터 타락에 미친 인간들이 기어코 무언가를 외기 시작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 아니, 인간을 배반하지 않았다면 알아들으면 안 되는 단어들. 데스브링거는 수백개의 뒷골목에서 살아남는 동안 길러진 본능으로 저것의 위험을 직감한다.
징조가 끓어오른다. 죽음에 다다른 육신들이 부스러지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훅 끼치는 사기에 데스브링거는 몸을 움직이려 해도 사제 근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발을 더 내디디면 해독제 값만 더 나가리라.
…아니지, 여기 사제가 있는데 이 참에 빠르게 주파를 하는 게 더 나을수도. 동공이 좁아진다. 실패한다 해도 제 목숨을 저기에 소모 시키지 않을 자신도 있었고, 빨리 내뺄 두 다리도 있었다. 저걸 그냥 완성시키게 내버려 두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
“여기 있어 봐요.”
안 그래도 사제는 신성력으로 최대한 저 머저리들의 영혼을 인간으로 돌려놓기 위해 그 자리에 말뚝 박힌 상태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범위에 있는 육신들은 신의 보호를 받아 악마숭배자들의 손아귀에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점점 더 황금빛 파장의 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할 만 하지 않나. 도적의 손아귀에서 매끄럽게 단검이 뛰놀았다.
“잠깐, 어딜 가려는 거냐?”
“저 쪽 양반 한 명이라도 죽으면 그만큼 더 늦춰지겠죠.”
“제물로 인간을 삼는데 시신을 늘리면!”
“아니, 어차피 저 인간들 될 대로 되라! 하는 상황일 걸요?”
그리고 뭐가 튀어나오는 순간에 신성력을 집중시키기에도 좋지 않느냐고, 칼날을 닮아가는 암녹색 눈이 덧붙인다. 신성을 믿고 함부로 몸을 쓰는 이는 이때껏 없었는데. 사제는 꽤 처음으로, 치료를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유연한 인간을 본다.
참 유연하고 빠르게 움직이려 하며 그걸 실행하는 사람이다. 이럴 시간 없다는 사실은 둘 모두 알고 있었고, 사제는 이윽고 동의의 제스처를 취한다. 까딱이는 고갯짓과 동시에 도적은 쏜살같이 모래밭을 가로질러 악마 같은 영혼을 가진 작자들에게 한 방 먹이기 위해 달려나간다.
금빛 물결이 조여 들기 시작한다.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태양의 광채가 가장 어두운 존재들을 살라먹기 위해,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데스브링거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하였다.
그녀가 전개한 성역에 별안간 굴러 떨어지는 것들이 무엇이었냐면 생명의 중심 하나, 지혜의 총본산 하나, 언어의 시작과 끝인 근육덩어리 하나. 악마에게 바쳐지기 직전의 숭배자들을 차례차례 조리하며 동시에 주문을 미루고 있었다.
솜씨 좋은 암살자다. 그녀는 도적이라는 호칭을 철회했다. 굴러 들어온 파편들이 흘리는 피는 죽어가는 검은 피에서 서서히 생피로 바뀌고 있었다. 신의 곁으로 돌아갈 생각은 말고, 다만 너희의 죄를 알며 저 하늘의 형벌을 마저 받도록. 기도 한 줄에 성역은 더욱 넓어진다.
호각 소리. 쨍하니 해변 전체를 꿰뚫는 멍멍하고 높은 소리가 순간 울린다. 달음박질 쳐 온 도적이 아슬아슬하게 성역으로, 그가 내던진 파편들 마냥 굴러 들어온다. 그녀는 데굴거리는 암살자의 모습에 순간 그가 죽은 줄 알았다. 덕지덕지 붙은 사기 탓일 지도 모르겠다. 죽은 것의 한기, 부패함, 그런 것들이 암살자의 몸에 그새 눅져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나!”
“으, 웨엑.”
암살자는 속을 게워내면서 천천히 신성을 받아들인다. 그러는 동안에도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고개를 쳐들어 눈짓을 마저 보내려 하고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순간 동안 몸 안에 쌓인 독성이 그를 가만 놔두진 않았지만.
“뭔가 문제가 생겼나?”
퉷, 퉷. 입에 남은 잔여물을 내뱉은 도적이 그렇다 대답한다.
“물안개가요.”
“…물안개?”
“멀리서부터 물안개가,”
그리고 사제의 억센 손이 뺀질이를 잡아당긴다. 가볍고 날랜 몸을 가진 암살자는 단숨에 잡아 채여 한 번 더 나동그라진다. 덕분에 하려던 말이 동강 잘린 그는, 여파로 입에 들어간 모래들을 뱉어 내고 있었다. 까끌함과 불쾌함이 혀끝부터 입안 살까지 전부 들러붙어 있었다.
그는 여차하면 사제를 노려 보았겠지만 그러진 않았다. 그도 아마 그러려고 했을 것이다. 호각 소리를 낸 사람이 자신이며, 물안개 이전에 주문이 끝내 완성되어서 도망쳐 온 것도 자신이다. 그는 일단 사제의 물리적 구호에 소소한 감사를 덧붙였다.
사제의 눈이 바다를 탐한다. 데스브링거는 그저, 신의 대리자인 저 사람이 제가 말을 전하기도 전에 무언가를 눈치챘으리라 생각할 뿐이다.
부정함이 느껴졌다. 사제로서는 절대 보고 넘길 수 없는 질척한 기운이, 성역의 가두리 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데스브링거의 치료가 끝나자마자 그녀는 눈 앞에 곧 나타날 어떤 강대한 적을 향해 신성을 쏘아붙일 생각이었다. 두 사람이 짧게 주고받은 대로, 행할 예정이었다. 성역은 그에 따라 점점 악마숭배자들을 가열차게 몰아붙였고 그녀의 뒤에 있는 깨끗한 모래사장은 미미한 은총만이 남아 있었다.
부정함을 찍어 누르라, 신의 종으로서 온 몸이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라 말한다. 신이시어, 작게 읊조리는 기도 하나에 광채는 더더욱 태양을 닮아 간다.
저들의 숨통을 앗아가리라.
신성한 일격이 끝내 아귀처럼 부정함을 덥썩 잡아 먹으려는 순간이었다.
저들의 숨통을, 앗아가리라. 그리 외치는 이가 그녀 뿐만이 아니었음을.
파도처럼 덮쳐 온 물안개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난다. 해안의 모래가 온통 사구로 뒤바뀌고, 바다와 육지의 경계면 일부가 파먹힌다. 끼익, 유령의 웃음소리를 닮은 기이한 소리가 들린다.
사방이 어둡다. 물안개와 휘날린 모래먼지로 인해 온 사방의 시야는 해가 저문 것처럼 컴컴했다. 바다가 바로 근처인 것을 알지만 피부에 닿아오는 껄끄러운 습기가 차원이 달랐다. 사제는 마기가 피부를 긁어내린다면 꼭 이런 느낌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귀가 멍멍하다. 거대한 그림자가 해변에 정박하자 동시에 모래가 치솟았고 파쇄음이 일었다. 주변이 격동하는 건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우지끈! 배가 부서지는 소리가 한 번 더 인다.
콜록, 기침소리가 작게 그녀 옆에서 난다. 이건 그러니까 암살자의 기척이다. 도로록 굴러간 시야의 끝에 암녹색의 형체가 걸친다.
“저 물안개 안에 유령선이 있나?”
물안개 속에서 점점 배를 부수는 소리가 아닌 다른 소음이 난다. 뼈가 짓이겨지는 소리, 악마숭배자의 비명, 이 세상 것이 아닌 존재의 울음소리. 그녀는 점점 다급해 진다. 사제 된 자로서 신의 걸음으로 정화해야 하는 작자들을 눈 앞에서 빼앗기고 있었다.
“유령선이 있나!”
“아이고야! 맞을 겁니다!”
바닷새마냥 가벼워 도적은 와중에 한 번 더 구른 모양이다. 이번에는 온 몸에 모래를 바른 데스브링거가 겨우 중심을 잡고 일어난다. 쉴 틈 없이 입 안에 무언가가 가득 차는 경험을 하고 있는 그는 또 다시 혀 위에 공기 외에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기 위해 이물질을 내뱉고 있었다.
그러나 사제의 태도가 태도인지라, 입가를 대강 닦아내는 중에 그는 이번에야 말로 사제를 노려본다. 무얼 하려고, 그리 묻고 있었다. 질문이 눈 안에서, 순간 좁아진 동공에서 여실히 보인다.
“만일 정말 유령이라면, 또한 인세를 떠돌지 않게끔 길을 알려 주는 게 사제의 일이지 않나!”
해변에 돌연 내려앉은 폭풍을 그녀는 천천히 헤쳐 나가기 시작한다. 묵직한 걸음이 서벅, 마른 해변을 지나 점점 소리를 키운다. 한 번 내린 결단의 걸음은 내딛는 것이 쉬워질수록 그 속도를 높인다.
도적은 이를 뒤쫓는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사제가 갑옷을 입은 채였기 때문이다. 갑옷을 입은 채 바닷가에 있겠다는 건 곧 물에 휩쓸려 철덩이 갑옷 사이에 끼어도 할 말 없다는 반증이요, 그러나 저 눈 앞에 있는 건 육지 위에 바다의 공기를 구현하는 미지의 존재인데. 건질 자신은 없어도 숨은 쉬게 머리채라도 잡아 들 자신은 있었다.
그리고, 그래, 대체 왜 그리 있는지. 그 이유를 듣고 싶기도 하였다. 그 놈의 흑진주, 그 놈의 해적. 이 지역에 일어난 일의 시작점이기도 한 저 유령선 위의 유일한 객에게, 이제 와 말 붙일 기회가 왔음에도 물러서기에는 늦은 감이 있지 않나.
사제 또한 말하지 않아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저 거대한 그림자를 보라. 악마의 이름을 땄다던 범선이 혹 저 배라면, 그 유령은 대체 왜.
대체 왜 악마숭배자들을 공격하고 있는가. 물안개와 모래먼지를 해치고 거리를 좁힌 결과물은 참담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숭배자들은 깔끔하게 목숨을 잃은 채, 그들의 피를 모래 위에 들이붓고 있었다. 뒤쫓아온 도적은 생의 기척이 저와 사제 둘 뿐인 걸 눈치채자 희미하게 숨을 들이켰다.
뭉쳐진 붉은 모래들을 발로 으깨듯 걸음을 내딛는다. 저벅, 젖은 땅 위에서 두 사람은 속도를 더욱 높였다. 배의 용골이 뒤틀리고 괴물이 위협적으로 쉿쉿대는 소리는 아직 멎지 않은 채다. 근원 되는 장소가 아마 지척일 텐데.
끼익, 유령이 웃는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은 그들의 길을 가로막으려는 어떤 집채만한 존재의 침범을 느낀다. 옆도 아니며 앞도 아니고, 다만 위다.
그림자 하나 만들어지지 못하는 곳에서 두 사람은 겨우 자신들이 디뎌야 할 곳을 찾아 내 몸을 내던진다. 마지막으로 발이 떨어져 그곳을 벗어남과 동시에, 쿵! 육중한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의 아주 지근거리라, 그들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반토막 난 바다 괴물의 머리와 악마숭배자들의 뱃머리였다. 두 개의 머리가 끝내 이곳에 널린 악마숭배자들 처럼 조용히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뱃머리는 자신의 뜯어진 용골을 저주하는 듯 비명을 지르는 표정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조각했겠지, 취향 한 번 고약한 자식들. 데스브링거는 머릿속을 차분하게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농담 따위를 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고개를 바로 옆으로 돌리면 예의 그, 오롯이 거대한 그림자가 서늘하게 정박해 있는 것이다. 숨이 막힐 듯이 드높고, 가늠하기에 너무 커다란. 두 사람은 벽에 가로막힌다는 표현을 이런 곳에서도 쓸 수 있음을 깨닫는다.
유령선, 삐걱이는 소리가 인사를 하는 듯하다. 끼익, 낡은 소음이 남은 두 살아있는 존재를 향해 다시금 웃는다.
쿵. 누군가 거칠게 갑판 위에서 발 굴리는 소리를 낸다. 무슨 화물이 으깨지는 소리마냥 살벌하여 데스브링거는 순간 침을 삼켰다. 어쩌면 공격이 날아올 지도 몰랐다. 악마숭배자들이 가진 모든 카드를 양단하고 절단내여 해변에 뿌려버린 미지의 공격.
그러나 사제는 의견이 다른 듯하다. 소리가 음울히 울림과 동시에 사제는 더욱 속도를 높인다. 모래가 그녀의 갑옷에 파고 들어가든 말든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내달렸다.
“배가 떠나려 한다!”
쿵, 한 번 더 누군가 발을 구른다. 동시에 유령선은 작별을 고하고자, 이승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구슬프고 기괴한 소리를 내었다. 죽은 배가 살려달라 울부짖는 소리였다. 이미 항해할 수 없는 배가 물에 떠 있다는 이유 만으로 파도에 실려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인퀴지터는 떠나려는 배의 밧줄 끝을 붙잡는다. 휘감기는 걸 매몰차게 거절하는 미끄러운 밧줄을 그녀는 무시한다. 강인한 정신력과 육신은, 항구 도시에서 보고 들은 습관들을 서툴게나마 적용하게끔 도왔다. 선착장에서 해적들이 어떻게 움직이더라.
빠져나가려는 밧줄을, 뱀 죽이려 하듯이, 목을 틀어 쥐려는 듯이 붙잡아 잡아채고 그녀는 마저 배 위에 오른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땅에서 들리는 것도 같았다. 아마 암살자의 소리 없는 비명일 것이다.
이윽고 가벼운 기척이 바람과 같이 스쳐 온다. 도적은 그녀가 내달리는 것을 보자마자, 그리고 승선에 기필코 성공하리라 밧줄을 휘감아 잡는 걸 보자마자 즉시 제 몸을 다른 곳으로 튕겼다. 악마숭배자들의 부서진 뱃조각, 그리로 튀어 올라 한 번 더, 날개 없이 날아올라 아슬아슬하게 그물망 언저리에 안착한 것이다.
“담이 작다, 뺀질이!”
“입 닥쳐요, 이 벽창호야!”
짙은 물안개 속에서 두 사람은 드디어 숨통이 트인 듯 소리 지른다. 어쩌면 곧 다가올 일이 어떨지 예상조차 되질 않아, 긴장을 토해내고자 함일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은 각자가 매달린 퀴퀴한 밧줄을 차근차근 오르기로 했다. 아무튼, 승선은 승선인 것이다. 하선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누군가는 망령을 정화할 기도란 무엇인지 고민하고, 누군가는 배의 어느 부분이 멀쩡하여 구명 보트라도 만들 수 있을지 머리 굴리고. 끼익, 두 사람이 배의 몸체에 발을 디뎌 수직으로 걸음을 옮기고, 드디어 갑판 위에 겨우 팔을 걸치려는 순간이었다.
뚜벅. 헛숨을 들이키게 하는 걸음소리다.
살아 움직이는 사람의 기척은 분명히, 저와 사제 둘 밖에 없었는데. 배에 매달리느라 희게 질린 손끝이 이제는 미지에 대한 공포로 질려가기 시작한다. 피가 소용돌이 치다가 심장으로 훅 몰리고 있었다. 혈액조차도 손끝 발끝으로 뻗어 나가 그 존재를 목도하기 싫은 지, 그의 심장 안에 웅크리려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손끝을 떨지 않으려 최선을 다 하고 있었고 그는 심지어 암살자였다. 사지말단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훈련을 가장 먼저 하는, 냉혹을 업으로 삼는 직업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그의 손은 의지를 벗어난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 머릿속은 백지가 된 것 마냥 막막하기만 하였다.
사제는 난간에 겨우 걸친 상체를 뒤로 물려야 하는가, 강렬한 고민이 일었다. 고개를 마저 들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직감이 들고 있었다. 이 앞에 걸음 소리 내는 존재는, 아무리 증표를 가진 자라 한들 쉬이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아니라고.
무거운 발걸음이, 한 번 더 소리를 낸다. 너희는 발을 들일 것인가, 그리 묻는 듯도 하였다. 끼익, 낡은 소리가 공기를 핥는다. 같은 하늘에 있는 두 살아있는 자들의 귀를 두드린다.
어서 행동해.
사제는 그러나 물러서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쿵! 석양을 닮아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가 갑판 위에 새로운 소음을 만들어 낸다. 그 소리에 반응하여, 심장에 피가 갇힌 듯한 도적도 그물망에 제 팔다리가 갇히지 않도록 조심조심, 이 배의 주인에게 들키지 않게끔 살며시, 다시금 기척을 정돈해 난간 위에 안착한다.
그리 안착하면 보이는 것은 눈이라.
데스브링거는 갑판 위, 유일한 탑승객을 마주 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 기척을 죽이려 노력했음에도 실패했다는 소리가 되겠다. 탑승객, 유령선 위의 유일한 존재, 망령. 그 망령은 걸음은 인퀴지터에게로 뻗으려 하는 듯했으며 또한 고개는 갑작스레 돌아간 듯,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채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안대가 보였다. 해적이라면 아주 익숙하게 착용하는 물건. 그렇다면 이 존재는 해적인가? 아니, 적어도 데스브링거가 알게 된 이 존재는 갑자기 이 도시를 뒤흔든 신원불명의 존재일 뿐이다. 고래를 팔 힘 만으로 바다에 도로 밀어 넣어 버리는, 범상치 않은 사람일 뿐.
뚜벅, 다시금 묵직한 걸음 소리가 울린다. 물안개 속에서 두 사람은 목소리를 내기에 너무 무거운 공기에 짓눌려 있었다. 공기 속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존재가, 숨소리 하나 내기 두려운 존재가, 그 분위기를 자아내는 망령이, 소리를 울리고 있었다.
어 잠깐, 점점 빨라지고 있지 않아? 데스브링거는 시선이 교차한 순간의 망연자실에 파묻혀 있다가 곧 정신을 차린다. 쿵, 쿵, 쿵! 제 심장소리 만큼이나 망령의 걸음 속도는 점차로 빨라져 왔다. 그러니까 그런 채로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는 거다.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
확! 이내 망령의 손길에 그의 케이프 앞섶이 잡아 채인다. 이걸로 오늘 하루 몇 번이나 당겨지는 건지 횟수를 세려다가 그는 포기했다. 이번에 그가 굴러 들어간 곳은 사제와 같이 갑판이다. 유령선의, 닳고 닳은 메인 갑판.
그리고 순간 거친 파도가 그가 있던 곳을 지나간다. 그러기 무섭게 망령은 그를 바닥 위에 내던져 버린다. 모양새가 거진 내다 꽂는 것과 엇비슷했다. 이건 억센 수준이 아니라 거칠고 우악스럽다. 바다 위 유일하게 두 다리로 선 채, 모든 무법자를 육지에 쳐박아 버리는 존재.
그러나 그 망령은 또한 파도를 피하게끔 건져 준 건가.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고 보니 바닥에 시끌벅적한 소리를 내며 메다 꽂혔다 한들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지. 데스브링거는 갑판을 손으로 짚어 자세를 바로 한다.
그건 조금 무서운데. 아주 직전까지 몸놀림을 조절했다는 소리인가, 아니면 이 유령선도 저 자도 형체가 없어 침입자를 아무리 배에 꼬라 박아도 상관 하나 없다는 뜻인가.
쿵, 쿵. 망령은 다시금 사제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걸음 하나에 심장이 내려앉고, 옥죄이는 긴장감에 속이 다시금 뒤집어질 것 같았다. 저 샌님에게 치료를 받아 그에겐 아무런 상처도 없었음에도 다리에는 쉬이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철썩, 그는 애써 바다의 파도 때문이라 여기기로 하였다.
데스브링거는 침착을 가장해 본다. 그리 해야 일단 풀린 다리가 움직일 생각을 하던 아니면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하건 할 것 아닌가.
숨 죽인 몇 초를 살뜰히 활용하기 위해 그는 눈을 홉떴다. 관찰이 필요했다. 저 망령이 대체 무엇을 하던 인간이었나, 민담처럼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 속에서 그는 그저 살아 있는 폭풍이었으니.
걷는 자세는 해적의 망나니스러움과 껄렁함 보다는 다른 것을 닮았는데. 사람이라 하기 어려운 힘은 출처를 감히 짐작할 수도 없고. 덜컹, 해변에서부터 떨어져 나온 배는 이제 바다의 한가운데인 듯 출렁거렸다. 데스브링거는 조타수도 노 저을 인력도 없는, 거대하고 외로운 배 위의 거대하고 외로운 망령의 등을 보다가, 별안간 그를 덮친 파도에 놀란다.
“망령!”
그건 아무래도 사제 또한 마찬가지였나 보다. 사제는 저에게로 일정히 걸어오던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거센 파도에 혹시라도 쓸려갔을까 곧바로 자세를 고친다. 그대로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확인이라도 되는 순간 갑옷을 여기에 두고 구조라도 할 성싶은 사람의 표정이다. 변함없이 올곧고 굳세다.
그녀가 제 갑옷의 여밈끈에 손을 대려는 순간 실루엣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에게는 이제, 바다의 선물이라도 되는지 파도 무늬가 여실히 드러나는 강철로 이루어진 검이 쥐여 있다. 사람 한 명의 키와 맞먹을 만한, 거대한 검.
저런 검을 쓰는 건 해적이 아니었다. 저건 차라리 기사에 가깝지 않나?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 데스브링거도, 그 검의 새파란 날을 코 앞에서 목도하는 중인 사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결과 함께 다시금 나타난 망령은 파도의 방해조차 받지 않는 듯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쥐여진 검을 끌고서. 방향은 변하지 않았다, 사제를 향하여. 사제는 그제야 퍼뜩 자신이 위험한 상황임을 인지한다.
“…샌님!”
데스브링거는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 짜 낸다. 그 샌님도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칼날이 가장 명확히 보이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모르겠는가.
방어가 필요하다. 그건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 그러나 몰아치기 시작한 파도 위의 난파선과 같은 배 위에서 중심을 잡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모래 위에서도 올곧게 서 있을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결국 디딜 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바다 위다. 갑옷을 입은 그녀는 자칫 잘못 하면 그대로 저 바다 밑에 가라앉겠지.
콰직, 그의 검이 찰나를 가르며 침묵을 종용한다. 수선 떨지 말라는 듯이, 길고 긴 검의 도신이 그녀의 바로 앞, 나무 갑판을 산산히 부순 채 박힌다. 애초에 이를 노리고 있었나, 간신히 자세를 다시 한 번 바로 한 그녀는 망령의 눈을 마주한다.
텅 빈 눈인가, 잃어버릴 것이 더는 없는 자의 눈인가. 회색 외눈이 쓸쓸함과 공허를 가득 담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있는 신록이 그의 눈에 담기고, 석양을 닮은 머리칼이 찰랑인다.
“자세를 낮추어라.”
그 망령의 첫 마디는 이 파도에 익숙치 않은 이들을 위한 경고였다.
“이곳에 너희를 위한 지지대란 없으니.”
붙잡을 것이라곤 구멍 숭숭 뚫린, 아주 낡은 갑판 뿐이다. 내려다보는 눈은 언뜻 그녀가 아니라, 그녀가 디디고 있는 바닥을 보는 것도 같았다.
꼭 그곳을 어서 붙잡으라 채근하는 모습이다.
곧바로 몰아치는 파도에도 망령은 초연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휘청이는 두 사람과 달리. 이 낡은 배와 휘모는 바다와, 풍랑 모든 것에 그는 흔들리지 않은 채로, 외려 한 몸이기라도 한 지 아주 굳건히, 서 있었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천둥을 토해내고 번개를 비 대신 뿌릴 것만 같았다. 구름이 득시글하게 내몰린 결과란 폭풍의 탄생이었다. 나무로 이루어진 갑판은 썩지를 못한 채 그저 끼익, 삐걱이는 울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죽지 못해, 수장되지 못해 바다 위에 떠 있는 배. 그리고 그 위에 존재하는, 두 사람이 승선하기 전까지 유일했을 존재. 그 자, 망령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제를 본다. 사제의 얼굴 낯빛을 보고, 뒤를 돌아 아직까지 힘겨워 하는 도적을 본다.
쯧, 혀 차는 소리가 울린다. 두 사람은 그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꿉꿉하고 눅눅한 공기가 서서히 둘의 폐에 들어차기 시작한다. 둘의 머릿속도, 안개가 찾아오듯 어지럽고 흐려지기 시작한다.
사제는 그대로 망령에게 놀아나고 싶지는 않았다.
“이, 렇게 바다에 떠 있는 목적이 무어냐!”
그러니 묻는다. 만일 구도가 필요하다면 나는 축원을 해 줄 것이라고,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성호경을 긋는 사제가 거기 있다.
혹은 이 바다에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 원하는 바라면, 필히 이곳을 성역으로 바꿔 놓으리라. 그는 신성이 가져오는 작열통에 매우 익숙한 사제였고, 지친 영혼은 저 자를 목도한 순간 단숨에 목적 의식에 의해 다시금 열정으로 들끓었다.
망령의 시선은 성호경을 긋는 손을 찬찬히 따라간다. 길을 잃은 배에게 필요한 몇 안 되는 별자리를 꼭 닮은 모양새다.
십자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망령은 그 십자가를 각막에 아로새기며 검을 거둔다. 거대한 파도를 품은 검이 도로 그의 등에 안착한다. 드넓은 등이, 검은 밤바다를 연상시켰다. 그 거대한 칼은 바다에서 왔으나 돌아간 품은 저 망령의 등이니, 다만 그래, 꼭 닮았다.
“정화를 원하나.”
물안개가 조금 가시는 듯했다. 대기에 존재하는 모든 물방울들이 걸음을 물리려 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목소리는 선명했고, 건조했다. 해변의 모래처럼 조금은 까끌했고, 그러나 곱게 바스라지고 있었다.
바다 위의 유일한 육지와도 같은 목소리였다.
“그리 원한다면, 행하라.”
뒤이은 말에 스민 감정이 무엇일까. 데스브링거는 풀린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일어난다. 끼익, 동시에 망령의 뒷꿈치가 제 방향으로 슬금 다가옴에 놀란다. 아주 눈이 사방에 있나 보지.
포말과 같이 아스라히 사라질 듯한, 그러나 모든 해변을 금방이라도 햇빛에서부터 순간 지키고 적시고 싶어하는 바다의 작은 손길 같은, 적적한 목소리. 거기에 스민 감정은 체념이다. 사제는 고해 성사를 하며 익히 마주해 온 감정이었고, 도적은 저가 마주하는 사냥감들의 일부가 내뱉는 단말마로부터 느낀 감정이었다.
어째서? 두 사람은 문득 그렇게 생각한다. 사제는 그러나 질문할 기회를 놓쳤다. 그녀는 이미 대답을 들어 버렸기에, 망령은 고개를 비스듬히, 서서히 돌려 가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멀리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은 데스브링거가 입을 뻐끔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일지도 모른다. 물고기가 필사적으로 이 바다 위 유일한 육지서 펄떡이는 소리 따위를 닮은. 시선이 돌아가고 몸의 방향이 돌아가기 시작하자 암살자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오소소 돋는 걸 느낀다.
“그, 목적은 뭡니까. 이런 일을 벌이는, 아니, 그,”
말이 정돈 되지를 못한다. 여기에서 이 이상 좋은 질문이란 대체 무엇일까 고민해 보아도, 시간을 반추해 돌이켜도 결국 그가 찾을 수 있는 질문은 이거 하나 뿐이다. 안개의 으슥함이 조금 가셨음에도 머릿속은 백지와 수많은 불안으로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헛숨을 들이킨다. 그렇게라도 해야 머리가 맑아질 것 같았다.
“너희가 상관할 일이던가.”
아니면 저 목소리에 의해 맑아지던가. 데스브링거는 어디 머리 한 대를 정확하 맞은 기분을 느꼈다.
저 말은 단언컨대 정답이고 정론이며, 동시에 배배 꼬이고 꼬인 오답이다. 도적은 그가 본래 이 도시에 도착해 할 일을 모두 끝마치고 난 이후에 저 사제와 한 대담을 끄집어 내 봤다. 그러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애초에 실없는 대화였다.
시간이 엮인 만큼의 책임감이 실린 이상에야, 그는 뒤늦게, 처음부터 대답이 정해져 있던 상황임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여전히 한 배를 타길 결정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뱃머리를 돌리기에 이미 늦은 이상 갈 때까지 가보자는 막연함이 그를 등떠밀었다.
도적이 별안간 숨이 탁 트인 듯 이죽인다. 그럼 지금 눈 앞에 있는 망령은 홀로 유랑하는 배란 말인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 거기에 승선했고?
한 배를 탔느냐 하면, 어쩌면 그는 또한 상황이 이리 만들었다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저 망령은.
“그럼 저는 또 왜 살려 주셨답니까.”
절벽에서 그에게 서툰 친절을 베풀고 사라졌기 때문에.
기실 그게 친절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해적 일을 돕기 위해 도시를 배신한 작자를 처단한 저가 그 절벽에 있었고, 그는 시체를 바다에서 구제했으나 다시금 끌고 갔을 뿐이었다. 그 행위의 기저에 무엇이 깔려 있을는지 그는 모른다.
그러나 다만, 그 때 들었던 슬프게도 나긋한 말투와, 이곳에 저를 메다 꽂을 때 통증 하나 없이 사뿐히 내려 놓는 솜씨를 고려했을 뿐이었다.
“살려…?”
물론 망령은 스스로가 한 행동에 큰 의미를 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 사람의 표정이다. 처음으로 눈 앞의 존재가 살아있다고, 데스브링거는 느꼈다.
사제는 오가는 말을 들으며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여긴 항구 도시의 앞바다이다. 그녀가 해로로 도시에 진입하려면 필히 거쳐가야 하는 곳이겠다. 그러나 그녀는 도시로 도달하기까지 단 한번도 저 망령의 모습을, 형체를, 심지어는 물안개의 티끌 마저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건 지극히 타당한 의구심이다.
“그대, 어째서 왜, 내가 도시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지?”
깊고 깊은 궁금증이다. 정화에 상관없어 하는 저 망령의 태도에서 연장된, 본능적인 불안함. 죄악에 몸부림치다 못해 신에게 매달리는 것마저 포기한 사람을 보는 듯한 기이함. 사제로서 반드시 막아야 하는 상황은 그들을 발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꼭 발생하곤 했다.
이 자에게는 분명히 무언가 있었다.
꾸물거리는 구름 사이로 순간 햇볕이 들이친다. 직선으로 꽂히는 하늘의 규율과 같은 빛이 어지러이 유령선의 갑판을 들쑤신다. 그 빛을 좇아, 바닷새들이 제 깃털을 선물하기 위해 한 마리씩 여행을 오기 시작한다.
팔랑, 끝이 회색빛으로 물든 깃털이 하나씩 갑판에 떨어진다. 물에 젖지 않은, 영리한 바닷새들의 깃이다. 타종 없이 하늘에 흩뿌려지는 흰 비둘기를 닮은, 갈매기 떼다. 바다의 하늘을 오가는 전령들.
이리저리 엉망으로 깃털 장식이 되는 배를 그는 확인한다. 무감한 눈이었다. 깃의 끝을 닮은 회색빛 외눈은 무기질적이라고 칭하기에 가감 없었다. 이미 죽어 해변에 떠밀려온 조개껍데기 같은 눈이었다.
“그게 바다의 뜻일 테니.”
이윽고 내어놓는 답은 참으로 간결했다. 너 사제가 이곳에 당도한 것도, 제 배에 승선한 것도 모두, 바다가 이끌어 온 것일 터니, 나는 순응할 것이다. 내포한 바에 그 개인의 의지란 추호도 없었다. 완전히 타들어간 재를 닮은 인간으로, 그들의 인상 속에서 망령이 화한다.
“너희 또한 할 일이 있기에 온 게 아닌가, 허면.”
두 청년이 다급히 무어라 더 이어 말하기도 전에, 그 망령이 덧붙인다. 검은 먹물로 얼룩진 듯 한 반절이 바닷바람에 매몰차게 존재감을 과시한다.
“돌아가 할 일을 하라.”
“잠깐, 그럼 당신은 누구…?”
사제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 앞선 모든 질문을 함축하여 그녀도 모르는 새에 언어의 작살총을 겨눠 그대로 쏘았다. 날카롭다기 보단 묵직했다.
그러나 그 끝엔 그물이 달려 있지 않지. 바다에 사는 망령은 그물 없는 질문을 또한 간단히 회피하였다. 갈고리도 악의도 없는, 순수한 의구심만이 그를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너희가 아는 대로.”
순간 두 청년은 직감한다. 숨이 막혀 오고 있었다. 분명히 해상임에도, 배 위에 있음에도, 바다에 빠진 양 숨이 헐떡이는 것 같았다. 물안개가 온 사방을 덮어 온다. 그 질문은 들을 가치가 없으며, 이 이상의 시간은 허가하고 싶지 않다는, 저 망령의 의사 혹은 이 바다의 의사일 것이다.
“나는 유령선의 망령이다.”
동시에 두 사람의 시야는 물거품 속으로 가라앉는다. 어쩌면 거품 그 자체로 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바다에 빠진 채 허우적 거리는 감각도, 힘이 빠져 부유하는 듯한 감각도 없이, 바람에 말 그대로 던져진 기분만이 둘을 공포의 한가운데에 놓이게 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목소리가 나왔던가? 소리를 지르긴 했던가?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는 기분이었다. 얼굴이 희게 질리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