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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팅.

 분노는 블루 토파즈를 감싼 막을 가볍게 튕겨 보았다. 퍽. 손톱과 살점과 뼈가 터져나갔다. 검지손가락은 겨우 한 마디 뼈만 달랑 남아있다. 특유의 검은 마기가 바로 빈 자리를 채우고 재생시켰다. 악마는 그 꼴을 가늘게 뜬 눈을 하고 관찰했다.

 슈르륵.

"..."

 눈 두 번 깜박이는 동안 재생이 완료되었다. 아직도 회복이 마음에 찰만큼 빠르게 되지 않는다. 건드려서는 안될 것에 손을 댄 대가다. 분노는 한 번 더 건드리거나 마법을 부어보는 대신, 공중에 떠있는 블루 토파즈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허리도 굽혀보고, 발뒤꿈치를 들고도 보았다. 그의 평생에 들어 봤으나 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보석은 상하좌우,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도 완벽하게 같은 빛을 낸다. 자잘한 빛에는 물결 위에 떨어진 별처럼 빛나고, 강한 빛에는 정오의 태양을 반사하는 바다처럼 빛났다. 블루 토파즈의 푸른 빛을 어디서는 "섬에 가야만 볼 수 있는 밤하늘의 색같다"고 하던데, 눈 앞의 것은 그 표현에 동의하기 어려울만큼 바다의 푸른색을 가지고 있었다. 새파랗고 새파란 색. 인간이 볼 수 있는 바다의 색은 이렇게까지 선명하지 않을텐데, 바다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을 색이었다.

 그러나 보석의 힘은 많이 약해졌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푸른 '색'이 아니라 푸른 빛으로 강렬해 형태가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수일에 걸쳐 그저 색이 보이는 수준까지 줄어든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블루 토파즈답게 되었다. 단단한 듯하지만, 깨지기 쉬운 성질. 분노는 침묵하다가 비죽 웃으며 한 번 더 손가락으로 튕겼다.

 팅, 퍽!

 여전히 손가락 한 마디, 뼈만 겨우. 처음 건드렸을때는 팔이 통채로 날아갔으니, 이만하면 많이 진정된 상태다. 조금만 더 녹으면 되겠지.

 그때 깨버리면 된다.

 여유롭게 생각했다.

 

 왜 소리내어 말하는 것이 어떤 영향을 끼친 다는 것을 잊었을까. 특히 안 좋은 일은 꼭, 말하고 싶어도 목구멍 너머로 삼켜야 그나마 덜 처참해지는데. 덜 비참해지는데.

 겨우 잠든 아이들의 방 문을 닫으며 아크메이지는 한숨도 삼켰다. 괜히 무슨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한숨 쉴 시간도 아쉬워서다.

 인퀴지터, 아크메이지, 데스브링거, 베르세르크, 악마기사, 그들은 얼마전 큰 전투를 버텨냈다. 결과는 전원의 자잘한 부상부터 골절과 관통상까지의 큰 부상, 그리고 악마기사의 '분실'이다.

 그 소식에 신전과 모험가길드, 마탑은 물론 도시 수뇌부까지 뒤집어져서 달려왔다. 그 중 성주는 가장 늦게 도착했고, 그는 난장판이 된 식당과 마주할 수 있었다.

 정말 엉망이었다. 신전과 마탑은 서로 멱살을 잡기 일보직전이다. 모험가길드는 팔짱을 낀채 뒤로 물러서있지만 언제고 품 안의 칼을 드러낼 생각이 만만이다. 그야말로 일촉측발인 그런 난장판이었다.

 다만 마탑과 신전이야 그렇다쳐도, 모험가길드까지 나서서 이렇게까지 각 파벌로 나뉘어 싸우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모험가들은 용병에 가까운 만큼, 이런 알력 싸움에는 고용되지 않고서야 발을 빼거나, 무시하거나, 중립을 지켰기 때문이다. 성주는 얼떨떨한 얼굴로 모험가 길드 지부장과 사무관을 한 번씩 본 뒤, 대충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요?"

 그에 모두가 성주를 돌아보았다. 눈이 한번 깜박일 순간이 지나고,

"아, 성주님."

"들어보시오, 그 악마기사의 몸이-"

"그 악마놈이-"

"아!! 조용히 좀 해봅시다! 거 신전 입만 입이요?"

다시 난장판이 시작되었다.

"이런 무례한-"

"무슨 일이냐 묻지-"

"악마기사는 모험가 길드 소속이니 우리의 책임-"

"마탑도 여기엔 지분이-"

"웃기지 마시오, 그건 악마라니까!"

"아니 무슨-"

"지금-"

"-전부 좀 닥치시게!"

...히끅.

기어이 아크메이지가 노호성을 터트렸다. 광활한 울림을 담은 사자후가 식당을 휩쓸다 못해 여관 건물 기둥을 흔들었다. 다행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물론 그만큼 효과는 확실해서, 한치라도 더 내버려두었다간 정말 멱살잡이를 할 기세인 마탑과 신전에, 눈이 돌기 직전인 모험가 길드 담당자까지 전부 얼어 붙었다. 용사일행을 받아 신났던 여관장만이 접수대 뒤에 숨어 딸꾹질을 시작했다.

아크메이지는 마른 세수를 하고, 그 손 그대로 이마를 짚은 뒤 입을 열었다. 첫 소리는 한숨의 것이다. 긴 한숨이 끝나고 아크메이지가 한손 검지를 들어 지휘봉처럼 휘두르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때까지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몇 가지 정리하고 시작합시다."

단호한 목소리가 시작 지점을 결정하듯 선고했다.

"첫째, 우리는 악마기사를, 또는 그의 무엇도 넘겨주고 갈 생각이 없습니다. 참고로 '우리'에는 인퀴지터부터 저, 데스브링거, 베르세르크가 포함입니다."

"이보시오!"

주교의 입이 벌컥 열렸으나 아크메이지는 보지도 않고 무시했다. 마탑의 마법사 하나가 주교를 뺀 범위에 방음마법을 치려다 모험가 길드의 시선에 관뒀다.

"둘째, 그는- 또는 그의 그것은 현재 아무도 건드릴 수 없소. 지금만 해도 여기까지 데려오지도 못 했단 말이오. 그 점은 신전 사제분들께선 이를 모르지 않으실텐데요. 벌써 섣불리 건드려보려다가 목숨을 잃은 사제가 있지 않습니까?"

사망자 발생 소식에 성주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물론 입만 뻐끔거리고 말았다.

"성급하게 결정해 더 이상의 손해를 보지 않으시는 걸 추천하겠습니다. 셋째, 그의 그 힘은 파괴의 힘이 아닙니다. 외려 그걸 건드리는 게 멍청한 짓인 쪽이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교가 왈칵 성을 냈다.

"무슨 헛소립니까, 사제가 죽었는데!"

"맞습니다! 신성력과 반발한 게 분명합니다!"

"감히 사제를 죽이다니, 삿된 힘입니다!"

 따라온 사제 셋 중 둘도 즉시 반발하고 나섰다. 아크메이지는 빈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완전히 날벌레라도 쫓는 모양새라 신전 인원들은 기가 막혀 얼굴이 울그락 붉그락해졌다. 벌어졌던 입에선 더이상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하는 겁니다. 주교님께선 못 보셨지만 우리와 몇 다른 사제들은 그 꼴을 봤어요. 그건 절대로 악의가 있는 힘이 아닙니다."

침묵한채 눈치만 보던 한 사제가 소심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유일하게 그 순간에 용사 일행과 같이 있던 사제다. 다른 이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몰리자 그 사제는 얼어붙었다. 주교는 혀를 찼다.

"태양에 가깝고, 거대한 생명의 흐름에 가까우며,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자연 현상에 한 없이 가깝지요."

탕! 역성을 담은 손짓으로 식탁을 두들기며 주교가 입을 열었다.

"아크메이지님,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게 자연 현상같다니, 우리 사제가 죽었다 지금 몇 번을 말합니까!"

아크메이지가 얼굴을 쓸어 내리며 한숨 쉬었다. 질린 기색이 완연했다.

"하... 주교님, 태풍에 악의가 있습니까? 불어오는 돌풍에 악의가 있어서 나무를 부러트립니까? 홍수에 무슨 자아가 있어서 아 이제 저길 삼켜야겠다, 하고 다가오느냔 말입니다. 그건 그냥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일 뿐이고, 굳이 건드려야만 재해가 되는 힘입니다."

"말도 안됩니다! 사람이 죽었어요! 건드렸다는 것만으로 터져 죽었단 말입니다!"

"주교님, 그 소리만 도대체 지금 몇 번을... 아니, 한 번도 다가가신 적이 없지요? 사제분의 시신도 안 보셨을 것 같군요."

움찔한 주교가 헛기침을 몇번 했다.

"그, 그렇소. 처참할 것을 어찌 굳이 보러간단 말이오. 그저 애도함이 옳거늘."

내실 하나 없이 콧대만 세운 대꾸에 모험가길드와 마탑의 전원이 한심한 눈빛을 보낸 뒤 저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하여간 신전이란! 꼰대들 같으니라고. 저러니까 발전이 없지. 아크메이지는 그 소근거림을 무시했다. 다만 안들리는 척만 했다. 

"그러니 그런 말을 하시겠지요. 저는 눈 앞에서 똑똑히 봤습니다. 사제가 그를 보며 신을 부르짖고 손을 뻗어 만진 순간, 아주 급격한 속도로 그 몸의 모든 상처가 치유되고 머리카락따위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라나는 것을요. 수습할 때 머리카락만 몇 m, 손톱발톱은 그 사제의 키만했습니다."

주교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그러니 그것이 파괴의 힘이라면, 과도한 재생으로 몸이 부풀어 올라 터질 게 아니라 그냥 즉시 폭발했어야 옳습니다."

마탑의 일원들이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적으로 맞다는 뜻이다.

"모든 사제와 마탑의 마법사들이 입을 모아 말하길, 그건 재생시키고 치유하는 힘에 가깝습니다."

마법사들이 또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험가 길드의 두 사람도 슬쩍 아크메이지의 편을 들듯 마탑쪽으로 자리를 조금 옮겨갔다. 이제 단 한명을 제외하고 신전의 사람들 얼굴을 거의 검붉게 보였다.

"마법사들은 그걸 보기만해도 문제가 풀리고 막히던 수식을 해결할 수 있게되더군요. 사제들은 눈물을 흘리며 '저것은 신성한 힘이 맞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주교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용사님도... 주교님께서 그리 믿으시는 신의 대리자께서도 쓰러지기 직전 그 빛

을 보며 단 한마디를 하셨죠. 눈물을 흘리면서요."

푸른 눈이 얼어붙은 호수처럼 빛난다.

"'아름다워.'"

시리고도 단호하게 주교를 노려보며, 아크메이지가 선고를 내리듯 어린 용사의 감탄을 재현했다.

"'당신의 영혼은 정말 아름답군요, 악마기사.'"

 

 

 

"이것 참, 안 반가운 상판떼기들이군."

아크메이지 뒤편, 위 숙실 층으로 이어진 계단에서 고운 미성이 아크메이지의 말을 덮으며 내려왔다. 이제는 익숙한 목소리다. 물 위를 떠다니는 수생식물처럼 가볍고, 음색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홀릴 아름다운 목소리다.

 끼익, 끽, 끼익.

"왠 구더기 들끓는 소리가 나나 했더니."

 그와 함께 나무 계단 밟히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부러 내는 것이다. 그는 이름답지 않게 목표를 위해 연출에 공을 들일 줄 알았다.

그래서 아크메이지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저것이 내려오기 전에 다 쫓아내고 싶었는데. 자신이 계단 바로 앞 식탁을 차지하고 길목을 막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저것이었다. 빌어먹을 대 악마 분노와 다른 사람들이 마주치지 못하게 하도록.

하지만 대 악마 앞에서 그까짓 인간의 방음 마법 따윈 쓸모 없었던 모양이다.

"이신 따까리부터 귀찮은 것들과 멍청한 것들과... 느려터진 버러지까지 왔군."

대 악마, 분노. 사악한 자가 악마기사의 육체를 입은채로, 오른손의 검지를 입가에 대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성질에도 안 어울릴 깜찍한 작태다.

"보아하니 지금..."

히죽.

악마가 웃었다.

"영혼봉인석 소식에 아주 눈깔이 다 돌아가셨나본데..."

회색과 연한 적회색의 눈동자가 식당의 인간들을 훑었다. 아치형으로 휘어 부드러운 눈매 사이로 차가운 눈빛이 번쩍였다. 시선의 궤적에 물리적인 힘이 있다면 이 공간 안에 모든 산 것들의 목이 떨어질 만큼 냉혹한 시선이었다.

"그건 우매한 버러지새끼들이 건드릴 게 못 되서 말이야...."

분노가 천천히 걸어 식당을 한 바퀴 돈 뒤, 느긋하게 아크메이지 바로 뒤에 섰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이며 오른 손가락을 서로 비볐다. 뭔가 수작질을 궁리하듯이.

"애초에 그 아둔한 대가리에 '영혼봉인석'이 뭔지 있긴 한가? 응? 깔짝깔짝 뭐 주워먹어보겠다고 아가리 바닥에 처박고 설설 기어 다니는 꼴 보여주진 말자고. 상상만해도 역겨우니까."

기울어져 있어 제법 길어진 머리카락 그림자 아래 은은하게 지어져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칼날처럼 변해 번뜩인다.

"꺼져."

방긋 웃으며-아크메이지는 보진 못했지만, 그 기색만으로도 정말 소름이 돋았다- 폭언을 날리는 얼굴은 정말이지 대 악마 분노에겐 분수 넘치도록 선한 얼굴이었다. 내용은 더럽기 그지없는데 목소리와 표정 만큼은 목화솜처럼 부드러운 목가의 얼굴이었다.

물론 줄기 줄기 쏟아지는 기세는 그렇지 않았다. 악의도 정체도 숨길 생각도 없는지 살기를 쏘아댔다. 안그래도 나이 많은 주교가 이내 끄륵, 끅, 하는 소리를 내며 입에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갔다. 분노는 신전 쪽으론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마기까지 뿜어냈다. 쓰러진 주교를 붙들고 어쩔 줄 몰라하던 사제들까지 이어 전부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사제들에 더해 마탑에서 온 일원 중에 악마의 등장 처음부터 눈에 띄도록 몸을 떨고 있던 자는 로브 밑에 지린내나는 웅덩이를 만들면서 고대로 무너져 내렸다. 나머지들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기해독제를 꺼내 먹거나 방어 마법을 시전했다. 얼굴 색을 봐서는 그리 소용없는 모양이지만.

모험가 길드쪽 두 사람 중 사무관은 괜찮은가 싶었으나 나무토막 넘어가듯 기절했다. 겨우 머리를 바닥에 부딪히기 전에 지부장이 붙잡았다.

그 꼴에 성주를 포함한 도시 수뇌부쪽 일원들도 얼굴이 파래져서 슬금슬금 뒷 걸음질 치다 여관을 아주 나가버렸다. 나, 나, 나, 나중에 다시 오겠소. 덜컹. 그때까지 몸을 돌리지 않은 채 꼿꼿하게 몸을 세우고 있던 아크메이지는 떨리는 손을 슬쩍 숨겼다. 그리고 대 악마에게 고개를 돌리며 몸에 힘을 조금 풀었다. 말로 상대해야하는 난장판보다 차라리 지금은 대 악마 하나의 헛소리를 들어주는 게 정신적으로 부담이 덜했다.

"얌전히 있어주겠다 했잖나!"

그 말에 악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지금 그래서 얌전히 말만 하지않았나? 응? 안 얌전한게 뭔지 좀 보여주고 그따위 약속 나부랭이를 해야했나?"

"자네가 이러면 그 몸의 주인에게도 문제가 생긴단 말이네. 자네 스스로 그 몸에 무슨 수작질도 할 수 없다 해도!"

아크메이지는 그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기가 막혔다. 기가 막혔지만, 무려 '대 악마 분노'가 이리 말만으로 짜증을 부리고 마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오늘 찾아온 자들이 전부 죽어나갈 것까지 각오했기 때문이다.

지난 전투에서 영혼봉인석으로 인해 육체를 온전히 차지한 대 악마 분노가 한 첫 마디는 '이런 시발!'이었다. 대단히 상스러웠으나, 당혹이 넘실거려서 거기 있던 모두가 같이 당황했다. '이 따위로 판을 엎으면 엿되는 건 나다, 이 버러지 새끼들아!' 그리고 그 자리에서 수작을 부린 악마숭배자들과 악마계약자들, 그들의 악마까지 모조리 썰려 나갔다.

그 뒤로 분노는 용사 일행들에게 다가와 '염병, 진짜 기분 더럽지만 네놈 새끼들이 이 몸 간수 좀 해라. 저것도.' 라고 말한 뒤 도시로 혼자 훌쩍 가버렸다. 일행들은 넋이 빠져 뒤 늦게 여러 뒷정리 후 도시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성문이 보일 쯤, 걱정이 되어 발을 빨리했다. 하지만 도시에서 대 악마 분노가 지나간 흔적은 따로 물을 것도 없었다. 숙소와 식사를 해결하고자 얼굴을 튼 몇몇 행인들과 상인들이 그들에게 달려와 '혹시 기사님이 싸우다 머리라도 세게 얻어 맞으셨소?'하고 물어왔기 때문이다. 따라가 보니 예의 여관이었다. 딸랑. 그래도 혹시 모른다고 침을 삼키며 들어서니 여관장이 달려와 울먹였다.

'한 분 먼저 올라 가셨는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대 악마 분노는 정말이지 단 한순간도 제 싸가지 없음을 참지 않았다. 다만 정체를 생각하면 그냥 싸가지 없음 정도로 끝난 게 천만다행이었다.

여관장의 증언으로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먹고, 마셨다. 방으로 가져간 술이 세 동이란다. 즉, 나가지 않고 제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하루 뒤 데스브링거의 말에 의하면 자정이 되기 직전과 새벽에 나가 그 보석을 살피고 왔다고 했다. 아크메이지는 피로를 견디며 그를 감시해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그 사이에 죽은 자들은 없어 다행이었다.

이틀째, 아크메이지는 현명한 눈치로 몇 가지 가설을 세웠다. 첫째, 분노는 지금 상황이 달갑지 않다. 둘째, 그는 지금 살인할 의사가 없다. 셋째, 그는 대 악마로서, 혹은 모두가 모르는 무언가로서 저 영혼 봉인에 대해서 알고 있다. 넷째, 이 모든 것은 악마기사의 책임, 혹은 힘, 아니면 무언가다. 그는 악마기사의 많은 비밀들에 대해서 파헤치고 싶다는 탐구의 욕망을 마음 속 깊이 눌러 치워냈다.

삼일째, 인간들을 식당에서 죄 쫓아낸 눈 앞의 분노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아크메이지를 바라 보고 있었다.

비록 혈관이며 뼈가 울룩불룩하는 손을 가만히 두질 못하는게, 마음만으론 몇번이고 도륙을 하고 싶던 모양이다.

"허어, 말은 바로하자고. 뭐, 그래. 일단 귀찮으니까 긴 건 제끼고.."

덜컹. 분노가 아크메이지에게 여전히 움찔거리는 손대신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첫째로, 거기 갇힌 건 '이 몸 주인'이 아니,"

흠칫.

악마가 눈에 띄도록 몸을 경직시켰다.

"아, 이, 애송이 새끼가...쯧."

혀를 참과 동시에, 악마는 입술 끝이 귀에 걸리도록 쭉 찢어 웃었다. 쩌어억. 찌익. 볼의 피부가 죽 찢어지며 지어지는 흉악한 웃음에 아크메이지가 지팡이를 더듬었다. 악마가 들어찬 몸은 저렇게 변형도 할 수 있는 것인가? 무엇이든,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게 벌어진 하관은 징그러웠다. 악어나 뱀이 눈앞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어도 이렇게 징그럽지는 않으리라. 쫙 찢어진 입에서 새어 나오는 조금 따스하고 습한 숨결은 피냄새가 났다.

아크메이지가 긴장해있는 사이 분노는 혀를 한 번 차면서 얼굴을 갈무리한 후, 하려던 말을 이었다.

"후... 이 염병할 같잖은 것들... 하여간 그걸 건드릴 수 있는 건 나 정도고, 그나마도 내가 '아니까' 건드릴 수 있는 거다. 이 멍청한 노인네야. 바꿔말하자면."

악마가 짜증난 목소리로 답지 않게 상세한 설명을 이어갔다.

"그 안에 든 것을 모르면 사탄 새끼여도 못 건드려."

딱. 오른팔을 들어 손가락을 튕겼다. 검지 끝에서 일어난 검은 불꽃이 점토처럼 형상을 바꿔 작은 인형과 보석이 되었다. 분노는 그것을 잠깐 바라보다 검지를 접어 없앴다.

"그건 세상 모든 바다를 통채로 압축시켜둔 것에 가까우니까."

니들의 그 잘난 이신의 조상놈이 기어와도 못 푼다 이거야.

다음 날, 불운하게도 지리멸렬한 탁상공론은 끝나지 않았다. 포기하지 못한 주교가 계속 말꼬리를 잡고 반발한 탓이다. 오전부터 늦은 점심까지 빈 말만 식탁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마탑의 인사들은 한참전에 머리 꼭지가 돌았고 말리려던 성주까지 기어이 폭발한 게 정오다. 모험가 길드는 참전하지는 않았으나 눈빛이 빠르게 차가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개인의 영달이라는 욕심에 눈이 먼 광신자의 말꼬리 잡기는 마땅한 근거도 해결책도 없었으므로 결국 아크메이지도 화를 냈다.

"주교님은 그럼 넘어진 아이에게 무릎 까진 책임을 물으실 겁니까! 넘어진 순간 잡아 당겨진 옷자락이 망가졌다고 혼을 내실 겁니까? 악마기사는 스스로 악마와 계약한 것도 아니고 온 생을 불살라 모든 악마들을 처단하고 싶어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주교님의 뜻입니까!?"

탕!

아크메이지의 지팡이가 바닥을 세게 쳤다.

"이미 악마의 숙주가 된 것 따위 알게 뭡니까! 그 무엇보다 우선되어야하는 것이 신의 말씀과 뜻입니다! 그건 악마입니다! 이미 악마라고요! 그게 숨쉬는 것 자체가 시궁창을 늘리는 겁니다! 그런 악마를 더 늘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시궁창을 구르는 애 몇 좀 있어도 그 시궁창부터 불질러 없애야 한단 말입니다!! 그것을 포함해서!"

핏대를 세우며 지른 말에 모험가 길드 지부장과 성주의 얼굴이 굳었다. 마탑 쪽 마법사들도 서로를 눈짓하며 적대어린 시선을 보였다. 그럼에도 주교는 억지를 멈추지 않았다.

"먼저 땅을 깨끗하게 하고 엄선된 신도들만 신앙을 가지고 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그 말에 끝내 성주도 화를 참지 못했다. 발을 쿵쿵 구르며 주교에게 다가와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높였다.

"사람을 골라 내시겠다고요? 주교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건 신전의 일이니 성주님은 끼어들지 마십시오!"

"방금 그게 무슨 신전의 일입니까! 사람을 줄세워 놓고 입맛대로 골라 내겠다니 이 무슨 미친 작자가...!"

아크메이지도 얼굴을 굳히고 씨근거리다가 다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엄선된? 엄선된? 정녕 돌았습니까? 세상에,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소! 비록 신전에서 자랐다해도 용사이고 인퀴지터인데 지나치게 아는 것이 협소하다고! 왜인지 이제야 알겠군요, 주교님! 당신이 그따위로 가르쳐서였어!"

모두의 눈동자가 주교에게 모였다.

그는 용사가 된 이의 어린 시절 교육을 담당했다.

"오로지 신의 말씀에 그렇다고 적힌 것 외에는 전부 태워버리라고 가르쳐 오신 겁니까! 세상에, 그 어린 것한테...! 악마기사의 용서에 왜 그렇게까지 감동하나 싶더라니!"

주교는 마지막 말에만 반응했다.

"감히 그런...! 용사로 키우기 위해 우리가 어떤 고생을 했는데! 그따위 악마 좀비따위의 말에 넘어갔다고!"

오로지 마지막 말에만.

모험가 길드 지부장이 마침내 참전했다.

"주교님!! 말을 철회하십시오! 그가 여태 해온 일은 우리 모험가 길드가 보증하고 있소! 비록 신전이라해도 그 발언은 좌시할 수 없습니다!"

주교의 입보다 성주의 분노가 재차 솟구치는 것이 더 빨랐다.

"지금 사람 목숨보다 신전의 권위가 더 중요하다고 하신게요!! 감히 성주인 내 앞에서 시민들의 목숨을 저울질해!!!"

탕! 주교가 식탁을 내리쳤다.

"신께 신실한 자들이 가장 우선됨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지부장과 성주와 주교가 그 고성을 마지막으로 서로 씨근거리며 노려보았다. 아크메이지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식탁 위 주인 모를 물 한잔을 마셨다. 그 틈에 잠시 숨을 고른 지부장이 침을 삼키며 화를 누르고 사무적인 태도를 회복했다.

"후, 그래요. 지금 솔직해지기 대회인가요? 욕망 까발리기의 장? 난장판이군요. 어쨌거나 모험가길드 지부장으로서 전달받은 길드 전체의 입장을 대변해 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악마기사가 확실하게 악마의 편에 서지 않는 이상, 그를 지지할 것이며, 또한 이런 위험상황에서 보호를 제공할 것입니다."

더 일그러질 수 없을 것 같았던 주교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감히...!"

찰나 마탑의 현자 하나가 나섰다. 오전에 내질러진 첫 노호성의 주인이다.

"주교님, 주교님의 그 입장은 전 신전과 신도의 뜻입니까? 신전은 신도들의 것이라 늘 말씀 하셨잖아요. 모든 신도가 상황도 맥락도 파악하지 않고 자비없는 단죄를 내리는 데 찬성했습니까?"

주교가 대꾸를 위해 입을 벌리려는 찰나, 침묵을 지키던 모험가 길드 사무관이 발언 기회를 앗아갔다.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모험가 길드 구성원들은, 악마기사를 보호하는 데 찬성한다고."

그와 지부장의 눈동자가 안와의 그림자 아래서 섬뜩하게 빛났다. 특히 지부장의 눈빛은 얼음송곳같았다. 대번에 주교가 겁을 먹고 어물댔다. 시간 낭비의 원흉이 더 이상 잡고 늘어지지 못하니 회의란 이름을 붙이기엔 모자랐던 시간이 그대로 흐지부지 끝났다.

그리고 윗층의 데스브링거는 아래층의 고함소리가 끊이지 않아서 정신을 이르게 차렸다. 몸 여기저기가 여전히 쑤시고 얼얼하고 쓰리고 아팠지만 멍한 정신에도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정보를 챙겼다. 사람들이 공간을 나가는 기척이 느껴지자 몸을 절뚝절뚝 움직여 방에 난 창을 통해 밖을 확인했다. 씩씩거리는 사람들이 하나씩 나온다. 성주, 주교, 마법사들, 가장 강경하게 악마기사의 편을 들었던 모험가 길드다.

조용히 내려다 보던 청년은 제 배를 옷과 붕대 위로 더듬으며 상태를 확인한 뒤 복도로 나가 다른 창문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갔다. 발소리를 죽이지 않고 모험가 길드를 따라갔다. 세 번 골목을 꺾자 지부장이 멈춰서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데스브링거가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얼굴이다. 그가 기척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해도 너무 적나라한 표정이라, 조금 삐뚤어진 생각이 잠시 들었다가 사라졌다.

탁.

"그 몸으로 그렇게 착지해도 되나?"

데스브링거가 입 안쪽 볼살을 씹으며 일어섰다.

"댁이 신경을 쓸 건 아닌 것 같은뎁쇼. 포 떼고 차 떼고 하나만 확인합시다. 모험가 길드는 왜 나리 편을 들죠?"

지부장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흥미롭다는 웃음을 지었다.

"그 양반 인복 하나는 정말 좋은 것 같단 말이야. 좋아, 설명해주지. 너는 기억 못해도 나는 널 알거든. 일단, 나는 지부장에 취임한지 얼마 안됐어."

"그런 거 같아보입디다. 근데 성주나... 윗대가리쪽이랑 무슨 인맥 쌓으려고 하기엔... 영 아니어보이던데."

"그렇겠지. 그게 목적이 아니니까. 말했지 않나? 얼마 안되었다고."

데스브링거가 고개를 갸웃했다. 모험가보다는 암살자처럼 콧등까지 올린 목깃에 후드까지 뒤집어쓴 지부장이 손을 들어올렸다.

"기억할지 모르겠군."

혹시 이 얼굴-

 

데스브링거는 생각했다.

나리, 나리가 뿌린 다정이 돌아왔어요. 사막에 씨를 심는 노인 이야기, 저는 전혀 이해 못했었는데, 이런 거군요. 이 순간을 위해서 씨를 뿌리는 거 였군요.

...비록 당신은 의도한 게 아니었겠지만.

 

"그리고 솔직히 더하자면, 돈 때문이야."

도로 후드와 망토 자락을 정리한 지부장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악마기사가 맡은 임무 중개료만으로도 작은 지부 하나는 말단 사원에 임시 고용까지 삼시세끼 고기를 먹일 수 있을 정도니까. 은혜 갚기도 있고. 지금 모험가 길드엔 그 사람에게 목숨 빚 진 당사자나, 가족 목숨 줄줄이 빚진 놈들이 많아. 자크라티에서건 에드니엄에서건 타타라에서건... 이 땅 위 수 많은 곳에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하여 거둔 유품, 생명, 가족, 친구, 우리의 팔다리따위를 빚졌어. 하하, 오죽하면 우리끼리 술자리에서 빚쟁이 길드라고 하겠어?"

우리 중에 신앙이 있는 녀석들이 있기는 하지만, 우린 모험가야, 작은 친구. 눈으로 직접 본 것만 믿지. 그러니 우리가 믿는 것은 악마기사가 행해온 역사뿐이다.

"그러니 조심하도록 해. 스스로 눈 감은 것조차 부정하는 자들이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니까."

 

 

신전이 침묵했다. 다른 지역 신전들에게 전보를 보냈지만 제때 도움이 될 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도움이 되기는 커녕 방해나 안 할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주교가 얼굴도 내비치지 않는 것은 다른 수작을 부리려는 준비일터다.

결국, 용사 일행은 직간접적인 방식과 모든 방향에 대한 방해을 막아낼 대응을 상정하고 계산해야 했다. 시간도 없는데 해야할 것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건조한 날들에 산불이 번지는 기세처럼 늘어났다. 데스브링거의 상처가 기어이 한 번 터졌다. 인퀴지터의 입술이 신성력으로 치료되기 바쁘게 씹혔다. 아크메이지가 밤에 몇 번씩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무리한 대가를 위장으로 치뤘다.

단 하나, 대 악마만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정보길드와 마탑을 오가며 들은 말에 사람의 실종이나 살해 사건이 들리지 않는 게 그저 다행이었다. 정체를 생각하면 그게 돕는 거 였다.

물론 진짜로 도와준다면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대악마니, 뭐라도 알겠지 싶은 탓이다. 일전에 말한 것도 있으니까.

데스브링거가 한숨을 쉬며 소득없는 열 아홉번째 책을 옆으로 밀었다. 스무번 째로 책을 고르던 와중에 그 기대도 없던 얼굴이 나타났다.

"멍청한 것들."

고개를 번쩍 든 인퀴지터가 퀭한 눈으로 상대를 확인하고 다시 침묵했다. 자신들이 책무더기에 파묻힌 원인이 누구인줄은 아냐는 질문을 삼켰다. 대가는 손에 들려있던 책이 대신 치뤘다. 나무에 가죽을 덧댄 표지가 구겨졌다. 아크메이지가 기겁해 책을 가져가 복원 마법을 거는 사이, 분노가 바닥 사정을 개의치않고 들어와 책상 위에 앉았다.

탁,탁. -탁.

주인 잃은, 기름하고 단단한 손가락이 비져나와 책상을 두들겼다

"흠."

매일 방에 처박혀 술 마시는 거 외엔 꼼짝않던 게 분노다. 악마기사를 꺼낼 생각이 있는 것 같았지만 도통 움직이질 않길래 기대를 버렸었던 아크메이지와 데스브링거는 직감적으로 저것이 필히 중요한 말을 하러 여기까지 왔구나 알아챘다. 하지만 변덕이 심해 어쩔 지 모르니, 괜히 말을 걸어 속이 터질 가능성을 감수하는 대신 책이나 마저 들춰 보았다.

그 모습을 보던 악마는 고개를 갸웃한 채로 입을 열었다.

"슬슬 건드려도 될 것 같던데."

책상 상판을 괴롭히던 손을 올려, 턱을 문지르며 툭 말했다. 잘 읽히지도 않는 마법서에 머리를 처박고 뭐라도 한 톨 찾으려 전전긍긍하던 이들이 모두 그에게 주목했다. 퀭한 낯에 눈만 반들거렸다. 뭇 사람들이면 겁을 먹을 법한 모습이었으나, 분노의 이름을 받은 자에겐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악마는 얼굴을 만지던 손으로 아크메이지를 콕 찍어 가르켰다.

"거기 늙은 놈, 봉인의 해주나 분해, 파훼 방면에 아는 게 좀 있나?"

군화에 담긴 발이 까닥까닥 흔들렸다. 아크메이지는 글러먹은 인상이 되었을 지언정 풀린 미간이나 지저를 기지 않는 목소리, 가벼운 몸동작을 보며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전문은 아니네만 그럭저럭 꽤 하는 편이네. 하지만 그 영혼봉인석을 푸는 방법은...."

"저번에 한 말은 어느 구멍으로 들었지? 그건 내가 할 거고. 니들따위가 해야할 건 잔여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쪽이야."

"잔여물?"

생각도 못한 단어가 나왔다.

"그래, 잔여물. 충전재라고 해야하나? 듣자하니 그 주변에 버러지들이 바글바글할 모양이라 친히 알려주는 거니 감읍해하도록."

인퀴지터의 얼굴이 구겨졌다. 데스브링거가 손을 뻗어 팔을 잡았다. 참지 못하고 뛰쳐올라 기어이 악마와 맞붙는 걸 막기 위해서다.

"...쯧, 이 몸의 꼴이 이게 무슨 일인지."

그걸 보던 악마가 콧잔등을 구기며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사흘 뒤에 봉인을 풀테니까 마법 쓸 머리랑 팔 잘 보존해 둬."

그대로 사라졌다. 마법이 아니라 그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인 것이다. 덕분에 문 경첩이 빠그라져 기어이 분해 되었다. 우지직, 우득, 쾅!

쾅!

...마탑의 문을 박살내고 간 건 혹시 주교의 머리 대신이었을까? 아크메이지는 눈앞의 문이 대신한 것 같은 자를 보며 혀를 찼다. 봉인을 풀려고 왔더니, 주교가 결국 그들의 뒤통수를 쳤다.

다행인 것은 그의 휘하에 있는 신전 인원들, 그것도 그 중 일부만 멍청한 짓에 동참했다는 점이다. 다른 지역 신전에서도 몇 온 것 같지만, 걱정만큼 수가 많지 않다.

예상보다 훨씬 적은 수임에도 대응이 쉽지 않았다. 지금 인퀴지터가 크게 힘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 역시 신성력을 쓰는 것도 원인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뒤에 있는 지켜야할 것에 악마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제일 문제다.

콰각!

그래도 대악마가 봉인을 푸느라 정신이 없어 다행이다. 아크메이지는 방어벽을 긁고 지나간 창의 주인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아니었으면 이 짓에 끼어든 신전의 인원들은 진작에 싸그리 타 죽었을 것이다. 머리와 사지의 수가 모자라지 않게 달린 숯덩이로 돌아가면 호상이었을 것이다. 아둔하고 미련하고 우매하기 짝이 없는 선택이다.

악마기사를 깨우는 것이 당장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것중에서 가장 훌륭한 방안이었는데도. 기어이 저 광신자는 스스로 멈추는 대신 모두를 절벽으로 밀어버리길 선택한 것이다.

쉬운 길을 눈 앞에서 뺏긴 답답함에 아크메이지가 노호성을 터트리며 방어벽을 강화했다.

"단단히 미쳤군!"

캉! 화살이 튕겨졌다.

"미친 건 당신이겠지! 어떻게 악마따위와 손을 잡아!"

주교의 답변에 있는 악마는, 이와중에도 분노의 대악마가 아니라 악마기사다. 아크메이지는 헛웃음을 지었다. 하.

"눈에 보이는 사실 대신 멍청한 아집에 사로잡혀서 기어이 다른 사람들까지 다 죽여 진실의 명예를 찬탈할 생각이오, 주교?!"

우매하여 기어이 자가당착의 진창에 파묻힌 주교는 대답 대신 세력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기사 본인은 인정하지 못한다 해도 답할 어떤 것도 없다. 아크메이지도 논리적 답을 기대하고 내지른 말이 아니다.

"진실된 자들만이 신의 단죄하심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우와아아아악! 이단심문관 몇이 기합을 내지르며 아크메이지를 뛰어 넘어갔다.

"!"

방어벽의 강도를 높이느라 범위가 좁아, 그 밖에서 다른 사제를 막느라 정신없던 모험가 길드 지부장이 뒤 늦게 쫓았다. 하나를 뒤에서 덮쳐 눌렀지만 둘은 놓쳤다.

"이런!"

"신이시여!"

"죽어라, 악마!!!!"

황금빛이 미약하게 감긴 검 두 개가 하늘로 솟아 올랐다. 퍽!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검 주인 하나는 떨어지면서 다른 인퀴지터의 무기에 꿰뚫려 즉사했다. 난장판을 참다 못한 분노가 봉인의 해제 술식 전개를 일시 중지한 뒤 걷어차 날려버린 것이다.

"시간도 없는데 이 개놈새끼들이 아주 가지가지해, 가지가지! 하여간 멍청한 것들이 신념을 가지면 다 이 지랄이지!"

그는 오른 손으로는 계속 토파즈를 잡은 채 왼손만 휘둘러 사제들을 뒤로 밀었다.   마법이 아니다. 그저 마기를 꺼내 휘두르는 것만으로 십수명의 신관들이 밀려났다. 어마어마한 힘이다. 순수한 마기만으로 물리적인 힘을 만들어내는 대 악마라니.

인퀴지터는 그 모습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았다. 악마가 휘두른 힘에 죽은 자들이 없었다. 죽이지 않아-날라가다 서로의 무기에 꿰뚫려 죽기는 했지만, 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다행이지만, 어째서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악마기사?"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오로지 그것뿐이다.

그러는 사이 주교와 그 휘하의 인원들이 겁 먹은 것을 숨기기 위해 소리를 지르며 마구 달려들었다. 압도적으로 강한 힘을 보인 상대여서, 개인의 영달을 욕망하는 광신보다도 생존욕구가 먼저되기 시작한 탓이다. 후퇴 대신 돌진을 택한 것은 상대와 상황이 달랐더라면 용감의 본이 될 만큼 미련하게 멍청했다.

"가, 감히 우리의 신앙을 욕보이지 마라!"

"뭐하느냐, 악마를 죽여라! 그것만이, 그것만이 신을 위함이다!"

"신앙의 진실됨을 증명해보이겠다, 악마!"

"시, 신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다아아아!"

달려드는 사제, 이단심문관들을 향해 검은 창들이 공중에 수십, 수백자루가 도열했다.

"귀찮은 새끼들...! 아, 그래, 악마 손에 뒤지면 네 놈들 신에게 버림받은 거다 해라!"

인퀴지터와 아크메이지가 명백한 살의에 분노를 말리려고 했으나 늦었다.

"!"

악마기사의 검은 창들과 같지만, 명백한 마기의 것들이 사람들을 꿰뚫었다. 그러고도 아무도 죽지 않았다. 모두가 주로 옷, 아니면 팔다리만이 꿰여 땅이나 멀리 나무에 고정되었다. 주교만 명백하게 협박의 의미가 내포된 창 두어 자루를 추가로 맞았다.

"악, 악마따위가 감히 신을 혀에 올리느냐!"

바닥에 십자 모양으로 고정된 채로도 꺾이지 않고 꽥꽥 소리를 질렀다. 검은 창이 가르고 지나간 주교의 양 볼과 목 왼편에서 피가 왈칵 터졌다. 데스브링거는 칼을 거두고 이마를 짚으면서 징하다고 생각했다.

방어전은 끝났다. 방금 저 마력 창들 한번에 신전 인원들이 전부 전투 불능이 되었다. 모험가 길드 지부장이 어깨를 으쓱하고 손을 털며 물러났다.

"하하, 뒤지면 결백이지만 신에겐 버려진 거고 살면 악마계약자고! 네놈들이 해오던 정당한 이단심문의 방식인 건 까맣게 잊었어?!"

"네 이 노오오오옴!!!!"

물론 주둥이 놀리는 것은 분노도 만만치 않았다. 데스브링거가 마른 세수를 했다. 인퀴지터가 얼굴을 구겼다. 아크메이지가 시선을 멀리 지평선으로 옮겼다.

대 악마는 깔깔 비웃다가 영혼봉인선의 파훼를 재시작했다. 새파란 빛이 일렁이며 뿜어진다. 바다 밖에서 관찰할 수 있는 물의 비늘이다. 손틈새로 새는 빛은 줄어들었다가 강해졌다가 다시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수인을 따라 바뀌는 물비늘의 빛 궤적이 거대한 뱀의 형상같다.

"이 땅 위 모든 악마는 다 죽어라아아악!"

데스브링거가 인퀴지터에게 물 냄새가 나지 않냐고 물으려던 순간, 광신자의 최후 발악이 급작스럽게 솟구쳤다. 주교는 검은 창에 베여 엉망진창인 제 몸뚱이를 무시하고 바닥의 창 하나를 들고 일어나 마구 휘둘렀다.

"주교님!"

당황해 말리려던 인퀴지터가 눈 먼 창날에 베였다. 창술을 전혀 모르는 휘두름이라 x자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상처는 우측 볼에서부터 입술, 턱 왼편, 그리고 잡으려 내민 왼손바닥이다. 깊지 않아 피가 크게 튀진 않았다.

"인퀴지터!"

"샌님!"

용사를 공격할 의사는 있었지만 상처를 낼 각오까지는 없던 주교가 그대로 당황했다. 아, 아니, 신의 대리인이시여. 아니.... 갈피 잃은 눈동자가 사방으로 굴렀다. 길 잃은 광신의 동공에 양 손으로 토파즈를 잡고 있는 악마가 잡혔다. 주교의 얼굴이 다시 지옥의 바닥 틈새처럼 일그러졌다.

"으아아아악!"

컥. 주교는 미련에 창을 놓지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돌진했다. 인퀴지터에게 지혈제를 주면서 바쁘게 눈치를 살피던 데스브링거가 넘어졌다. 발광하는 기세에 방어에 실패하고 팔을 베이고 그대로 밀쳐져 땅을 굴렀다.

"망종!"

"으."

"자네 괜찮나?!"

놀란 인퀴지터가 손을 뻗었다. 지혈제조차 다 바르지 못한 손에서 피가 떨어졌다.

데스브링거의 피도 줄줄 흘러 털어졌다.

땅을 유영하던 물비늘 위로.

"으아아아아아아!!"

"진짜 돌았네, 이거!"

파아아아앗-

빛이 뿜어진다. 푸르다 못해 시려 흰 빛이다. 눈이 멀 것같이 강렬한 빛이다.

"...하여간 이신 따까리 놈들은 도움이 안돼!"

아이들을 지나쳐 돌진하던 광신자는 뒤 늦게 지부장이 잡아챘다. 분노는 진동하는 빛 덩어리에서 몸을 뺐다. 세상을 헤엄치던 유순한 물비늘의 빛은 한겨울 설원보다 차가운 흰 빛이 되었다.

"아무것도 건드리지마! 뒤로 다 꺼져!!"

동시에 땅이 얼어붙었다. 지하까지 빛이 들어가고 있는지 땅이 울컥거렸다. 콰득, 콰지직, 콰곽. 얼음덩어리들이 부딪히고 솟아 오르며 지르는 고함소리가 들린다.

"얼어붙기 시작했군."

지부장이 거품을 물고 기절한 주교를 끌고 달렸다. 데스브링거가 인퀴지터를 챙겨서 달렸다. 아크메이지가 뒤늦게 도착한 성주일행의 도움을 받아 피신했다.

빛이 강해진다. 공기조차 얼어붙는다.

"젠장, 잘못건드렸어! 저 미친놈이!"

깨진다. 쏟아진다.

분노는 경악하며 무의식적으로 팔을 교차했다.

 

하얀 빛이 시야의 모든 것을 지우고

 

"-영혼봉인석이...! 악마기사! 안됩니다! 눈을 뜨십시오!"

"저거 깨지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나리, 나리, 안돼요! 이 미친 악마놈아, 나리 못 돌려내면 가만 안둘거야!"

"아니, 아니야! 다들 빨리 지혈제 바르게! 악마기사! 괜찮네! 우린 괜찮아!"

 

세상 단 하나의 블루 토파즈가 깨진다.

갇혀있던 대양의 푸른 물이 온 땅위로 흘러내린다.

 

'진짜 이 미친 호구 새끼...!!'

 

반짝.

AquaRyuichi Sakam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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