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사는 생각보다 쉽게 검술에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묵직한 둔기와 가벼운 칼날의 차이에 버벅대던 적도 있었으나, 전투에 익숙한 이단심문관에게 무기는 무엇이든 쉽게 익숙해지는 법이다.
종일 이곳저곳에 불려다니며 환자들을 치료하는 동시에, 남는 시간에만 베르세르크에게 검술을 배웠음에도 그랬다. 오히려 신성력을 사용하기가 예전보다 훨씬 쉬웠던 덕분이었다.
‘…그 꿈, 이후에.’
인퀴지터는 확신했다.
신께서 자신의 꿈에 다시 찾아와주었을 때부터.
정확히는 신이 그 차갑고 창백한 손으로 제게 무언가 가져갔던 순간부터, 작열통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고 말이다.
그 덕에 거의 무한으로 신성력을 쓸 수 있게 된 용사가 있는 베르뮈헨에는 더 이상 남은 환가는 없었다. 그래, 용사가 늦는 바람에 미처 치료하지 못하고 신의 품으로 돌려보낸 자들을 제외하면. 더 이상의 환자는 없는 것이다.
좋은 일이다. 좋은 일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어째서?’
하지만 왜 하필 지금, 신께서는 제게 작열통을 거둬가신 것인지, 인퀴지터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의문을 검술을 배우며 털어냈다. 머리를 비웠다.
그러던 어느 날 베르세르크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가르쳐 줄 것이 없다.”
“…아.”
그녀는 인퀴지터의 등을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최근 많이 가라앉아 보였으나, 그녀 또한 제자를 가르치며 나름의 기분 전환이 된 모양이었다.
“훌륭하다! 남은 부분은 오롯이 네 혼자의 몫이다. 끊임없이 생각하되, 그 생각에 매몰되지 말아라. 끊임없이 수련하되 휴식을 잊지마라. 이게 내 마지막 조언이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꾸벅, 인퀴지터가 이젠 제 스승과도 같은 이에게 배례했다. 그녀가 무릎을 꿇고 손과 머리를 바닥에 붙이자 움직임에 송글진 땀이 떨어졌다. 일어나보니 베르세르크는 어느새 소리 없이 그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
“…샌님.”
그리고 그 빈자리를, 다른 이의 목소리가 채웠다.
“가실겁니까? 지금.”
“…….”
데스브링거의 물음에 인퀴지터가 제 손을 쥐었다 펴며 몸의 상태를 확인했다.
새벽부터 일찍이 나와 노을이 질때까지 환자들을 치료하고, 그 이후 하늘이 컴컴해질때까지 검술을 수련했음에도 몸은 멀쩡했다.
아무런 작열통도, 근육통도. 정신적 피로감조차 없었다.
용사는 지금의 자신의 상태가 만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을 확신하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지. 어디 계신지 알고 있나?”
“조금 정도는 쉬지 않고… 우선은 따라오십쇼.”
데스브링거가 얕게 투덜거리며 몸을 돌렸다. 허나 그 투덜댐 속에 걱정이 스며들어 있음을 알고 있기에, 인퀴지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데스브링거 또한 그녀의 심정을 알고 있으리라.
그래. 그들은 더 이상은 늦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한창 만두들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던 때에, 나는 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혼자는 아니었다. 이 몸에는 무려 2명 분의 영혼이 더 있었으니.
「…정말 계획하신 대로 하실 생각입니까?」
응.
루인이라고 했던가. 함께 이 몸에 갇혀있는 영혼 중 한 명이 내게 물었다.
‘내 충고를 이딴 식으로 받아들이다니…. 너 같은 바보 천지도 세상에 둘은 없을 거다. 다시 말하지만 난 몰라.’
「무책임한 소리 하지마, 버러지!」
‘어쩌라고? 그레트헨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상 도무지 우리는 간섭할 수가 없는데.’
「…….」
이제는 퍽 익숙해진 투닥거림을 듣고 있자니, 귀에 익은 발걸음 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옵니다.」
사뭇 긴장된 어조로 루인이 말했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나는 조금 후련한 심정이었다.
이제는 버릇이 된 듯 연신 목을 긁으며 고민했다. 달빛에 빛나는 새카만 유리질의 매끄러운 얼굴선이 반사되어 희게 빛났다.
‘어떻게 설명해야 납득할 수 있는 마지막이 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역시 끝까지 컨셉을 유지하는 게 좋겠지, 그렇지?
「저한테 물어보셔도….」
‘멋대로 해, X발. 어차피 우리가 뭔 말하든 안 들을 거잖아. 끝까지 네가 제일 잘하는 기만질로 끝내던가.’
두 영혼의 말을 들으며 달빛 아래 바위에 앉아 있던 내가 서서히 일어섰다. 나무 사이로 두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항상 차고 다니는 마법등 덕분에 그들의 모습은 퍽이나 잘 보였다.
만두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바로 결정할 수 있었다.
“왔어?”
마지막만은 진심으로 대하자고.
복잡한 컨셉이니, 기만, 악마로 오해받을 걱정 따위 다 내던져 버리자고.
내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은 만두들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악마기사…? 가 맞으십니까?”
“…나리?”
그나마 전처럼 갑작스럽게 뒤통수를 후려갈기려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너희들과 여태껏 여정을 함께하며 같이 지내온 악마기사를 찾는 거라면… 내가 맞아.”
스르릉.
익숙하게 등 뒤에 꽃혀있는 투헨더를 뽑아든 내가 답했다.
“하지만 난 악마기사가 아니야.”
“…….”
혼란스러워 보이는 만두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로 답하며 말을 이었다.
“검술을 배워달라는 내 부탁을 들어줬구나.”
“…….”
“너희들이 궁금해하는 ‘만두’ 라는 건, 다른 세상의 음식이야. 내 고향의 향토 음식.”
“…다른, 세상 말입니까?”
“응.”
가볍게 대답한 내가 안대를 벗어 바닥에 던졌다. 내 행동에 만두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온 몸이 흑요석으로 변해 검게 반짝이는 가운데 유일하게 말린 장미꽃처럼 옅은 붉은 색이 눈에 띄었다.
“나리, 어째서….”
데브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나는 오른 팔을 감싸고 있는 건틀렛 마저 바닥으로 떨궜다. 그러자 어느 때와 같은 검은 팔이 모습을 드러낸다.
머리카락을 가볍게 오른 손으로 쓸어 올리자 유리가 부딪히며 채앵, 공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흑요석으로 이루어진 머리카락들이 서로 부딪히며 요란한 빛과 소리를 내었다.
손을 타고 올라온 마기가 기어코 머리 위에 검은 뿔의 형상이 되어 넘실거렸다.
참으로 악마 같은 작태였다.
“어때?”
“…….”
“이제 좀 토벌할 만한 모습이지 않아?”
“…악마기사…. 아니,”
자조적으로 웃는 내 말투에도 개의치 않은 채 김치만두가 물었다.
“제가 어떻게 당신을 불러드려야겠습니까?”
“…글쎄.”
북두칠성. 그 별명을 댈까 하였으나, 지금 내가 몸담은 세계는 길잡이 별이 없었다.
하여 다만 내 본질을 읊는다.
“얼어붙은 불.”
“…….”
“악마를 가두는 누름돌, 불꽃을 감싼 얼음, 분노를 둘러 감은 족쇄….”
“…….”
“다른 세계에서 끌려 온 영혼.”
차례대로 지칭을 읊자 흔들리는 만두들의 눈빛이 보였다. 다만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을 마쳤다.
“아무렇게나 불러. 너희들이 편한 걸로.”
“…….”
“이제 마지막 질문의 기회만이 남았는데. 궁금한 게 무엇이 남았지?”
“…이번에도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저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눈치가 많이도 늘었다. 그런 김치만두가 기특하다는 얼굴을 애써 숨기지 않으며 나는 투헨더를 가볍게 빙빙 돌려 손목을 풀었다.
이 육체는 근육을 푸는데 별다른 의미가 없었으나…. 기분상이다. 느낌상.
“네 말이 맞아. 너희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
“나를 전투불능 상태로 만들어봐.”
“…나리?”
그제야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고기만두가 낯빛을 굳혔다.
“나를 이기면, 그 어떤 물음에도 침묵하지 않을 테니.”
투헨더의 날이 달빛에 붉게 빛났다.
마치 불을 품고 있는 것처럼 요동쳤으나, 겉면은 차가운 것처럼.
악마기사가 제 검은 코트마저 벗어던지며 가벼운 차림으로 달려들자, 인퀴지터가 그의 검을 정석으로 받아내었다.
채앵!!
어두 컴컴한 밤에 불꽃이 튀기며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한 명은 웃고 있었고, 다른 이는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암살자는 밤의 그림자에 녹아들어 제 모습을 감추고 얼어붙은 불의 빈틈을 노렸다.
“하하….”
다른 세계의 영혼이 목숨이 걸리지 않은 싸움에 경쾌한 얼굴로 웃었다. 그 모습에 인퀴지터는 다만 낮게 침음했다.
이리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건만, 나는.
“제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질문은 나중에.”
장난스레 답한 이가 제 다정함을 증명하듯, 뒤늦게나마 답해주었다.
“지나간 과오는 잊어버려라. 나는 이미 너를 용서했고, 애초에 화가 난 적 또한 없었으니까. 다만 너는 미래가 더욱 나아질 수 있도록,”
카앙!
“여태까지 그리 해왔던 것처럼. 네 방식대로 나아가면 돼.”
퍼억!
유려하게 뒤 바뀐 투헨더의 리캇소 부위에 어깨를 얻어맞은 인퀴지터가 비틀거렸다. 하지만 울리는 머리을 똑바로 부여잡으며 하얀 검의 도신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 투헨더를 위쪽으로 쳐낸 뒤, 얼어붙은 불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잘 배웠네.”
챙그랑!
미소와 함께 갈비뼈 부근의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와, 인퀴지터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어째서.
물리적으로 깨질 일이 없다던 그의 몸이, 이리 쉽사리 부서져 내린단 말인가.
한 두 걸음, 뒤로 물러난 이가 조금 비틀거렸다. 허리춤에 맞은 검에 복부가 깨져나가고, 조개껍질의 결처럼 깨진 금이 몸을 타고 흘러 오른 무릎에까지 기어코 파고들었다.
“커헉,”
“…!!”
물러난 이가 콜록대며 밭은기침을 내뱉으며 잠시 비틀대었다. 하지만 이내 자세를 바로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이리 빈틈을 보임에도 공격하는 이가 한 명도 없음에 웃었다.
“조금 아프네.”
“…아, 악마기사!”
금방이라도 하얀 검을 내던지고 제게 달려오고 싶어하는 김치만두를 제지하며 말했다.
“그만두지마.”
“……!”
“넌 잘 하고 있어.”
멈추지 않는 고통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림에도, 그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제 몸의 일부였던 검은 유리를 털어내었다.
투둑, 상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찢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척추가 보였다.
검의 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유리로 이루어진 회색빛 뼈가 보였다.
그래.
“계속해보자.”
얼어붙은 불은 다시 투헨더를 들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자신이 정신적으로 내 몰린 지금이 검을 연마하기엔 제격인 상태였다.
까드득, 카득.
이제는 버릇처럼 제 목을 긁으며 답답한 숨을 내쉬는 영혼이 다시금 용사에게 달려들었다. 마기가 넘실대며 머리 위에 환영처럼 넘실대는 뿔이 촛불처럼 바람에 흔들렸다.
허나 이마저도 잠깐이었다. 꺼질 듯 위태롭던 마기는 다시 제 자리를 찾아 단단히 정돈되어 용사를 향해 날름대었다.
그 모습이 퍽 사탄보다도 더욱 악마같아 보여서, 얼어붙은 불은 자신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용사의 가장 날카로운 검이 될 것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달빛이 하늘의 정 중앙에서, 나무의 중턱에 걸릴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채앵!
만두 두 명의 연계는 훌륭했다. 김치만두가 신성력을 내뿜으며 제 몸에 흠집을 내면, 고기만두가 그 빈틈을 파고들어 지렛대처럼 유리를 깎아내었다.
하지만 이기고 있는 만두들의 얼굴이 퍽 엉망이었다. 제 자신은 이리도 후련히 웃고 있는데도, 무엇이 그리 그들을 슬프게 만든건지.
김치만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그럼에도 검을 휘두르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이러시려고 제게 검술을 배우라 하셨습니까!”
“그랬지.”
나는 이제 더 이상 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이러시려고, 저희와 그리 거리를 두셨습니까!?”
“이렇게 빨리 이뤄질 줄은 몰랐지만…. 그것도 그랬지.”
카앙!
떨어져나간 왼팔 대신 오른손으로 투헨더를 비틀어 뒤에서 등을 노려오는 고기만두의 부정검을 막아내며 답했다.
“허면….”
그 빈틈 사이, 김치만두가 내 심장을 향해 신성력이 담긴 검을 똑바로 내질렀다.
아,
이건 피할 수 없다.
투콱!
“윽.”
심장에 내리꽃힌 검으로 인해 생긴 금이, 안 그래도 멀쩡하지 않던 몸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시야가 조금 기우는가 싶더니 깨진 내 몸이 바닥에 흩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머리가 남아있는 몸과 함께 잔디밭을 굴렀다.
투둑, 툭….
“허면, 저희가….”
“…….”
무슨 말을 하려고 답지 않게 이리 뜸을 들이나.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용사의 볼을 쓸어주고 싶었다.
“저희가… 당신을 슬프게 만들었습니까?”
“…….”
“그래서 이리 부서지신 겁니까?”
…아.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만…. 어차피 쌤쌤이 아닌가. 나는 일부러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지금 나도 너희들을 울려버리고 말았으니, 우리 퉁친걸로 하자.”
“하지만, 다른 세상에서 오신 당신이 이리 희생하실 필요는….”
이건 희생이 아니다.
“너희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희생을 하고자 하는 게 아니야.”
“…….”
오히려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보라, 자신 때문에 울고 있는 미욱하고 어린 것들을.
“오히려… 이기적으로 나 혼자 편하게 쉬고 싶은 것일 뿐이지.”
그러니 어서 해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지극히 사랑한 너희들만이 나를 상처 입힐 수 있으니.
김치만두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검을 내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녀의 목소리 또한 손처럼 떨려왔다.
“…이제 답을 못하실 테니,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럼.”
고기만두 또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다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우리 둘의 대화를 들으며 창백히 질린 낯으로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저희를… 조금이라도 좋아하셨습니까.”
마지막 질문의 답은, 의외로 쉬웠다.
“언제나.”
“…그렇습니까.”
“응, 귀여운 음식 이름으로 애칭을 붙여 속으로 불러대다가, 무의식중에 별명을 입 밖으로 내어 버릴 정도로.”
…너희를 사랑했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이내 시야가 캄캄해졌다.
비로소 참된 안식이 도래했다.
***
그 후, 용사 일행의 대 악마 토벌은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 난이도가 하향되었다.
무엇이든 베어내며 날의 무뎌지지 않는 회색빛의 성검. 축복받아 흐르는 샘물처럼 넘칠 정도로 솟아오르는 용사의 신성력.
그녀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고, 수 많은 악마들이 목숨을 잃었다.
더는 신성력의 한계가 없어진 인퀴지터가 사탄을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 또한, 어쩌면 당연하리라. 그녀의 신성력은 사용할수록 그 그릇이 안정되고, 커져 갔으니 말이다.
기어코 이 세계의 마지막으로 남은 마를 없앤 인퀴지터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곤 다시 내뱉으며 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
잠시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성검의 손잡이에 박혀 있는 말린 장미의 색이 빠진듯한 붉은 빛의 보석과 찬찬히 눈을 맞추었다.
그 보석을 보고있자면, 그 다른 세상에서 온 영혼의 시선과 오롯이 마주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용사는 주의를 둘러보았다. 사탄을 물리치고, 끝내 목표를 이뤘음에도 기뻐하지 못하는 일행들이 보인다.
그녀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신이 이리 다정했던 것은.
그녀는 건방지게도 자신의 신의 지칭을 멋대로 불렀다. 하지만 그녀의 신은 이런 사소한 일을 가지고 뭐라고 할 성미가 아니여서, 다만 다정히 웃어주리라.
“…신이시여.”
…….
“얼어붙은 불꽃이시여.”
…….
“흐르지 않는 불이시여. 생명을 집어삼키지 않되, 다만 빛으로 포근히 감싸 안는 불이시여.”
…….
“존경하고 경애하는 당신이시여. 제 자신은 돌보지 못하는, 전지전능하지 못한 불완전한 신이시여.”
…….
“불경한 질문을 용서해주시겠습니까. 다만 한낱 미물이 고합니다. 저는 당신이 걱정됩니다. 이런 제 감정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
“이제와서 제 작열통을 거둬 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 말도 못하고 여태 그 검에 갇혀계시나이까. 그렇다면 목적을 전부 잃은 지금, 당신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영원히 그 검속에 갇혀 계신다고는 부디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악은 멸하되 세상의 불행은 이토록 끝나지 않는다.
용사는 제 주변인들이 행복하지 못함에 다소의 허무함을 느낀다.
오롯이 단 한 명의 부재로 생겨난 결과였다.
그런데,
“…이봐, 잠깐.”
마이스터가 하늘을 가리켰다.
순간, 인퀴지터는 보았다.
인동덩굴 마냥 생기를 머금고 뻗어나가는 영혼의 기운을.
별꽃이 바람에 흔들리며 꽃잎이 저 멀리까지 날아갔다.
회색 검에서 피어오른 덩굴이, 구전 동화처럼 하늘에 구멍을 뚫을 것처럼 자라올라 꽃을 피웠다. 이윽고, 그 덩굴의 맨 위쪽에서 꽃봉오리가 피어올랐다.
그리하여 봉오리 속에서 이 세상에선 존재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던, 하얗게 빛나는 북녘의 길잡이 별이 제 모습을 피워내었다.
다만 스러지지 않되 유난히 밝게 빛나는 별은 그 자체로도 태양과는 다른 의미로 아름다웠다.
하늘을 가로지르며 시간과 날씨를 주관하는 태양과는 달리, 오롯이 한 방향에 존재하며 이 세상의 밤길을 인도하는 북두칠성이 되어 세상에 긍휼을 베풀었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악마들이 멸절했음에 기뻐하는 가운데, 일행들만이 침통한 심정이 되어 간절히 그를 위해 빌었다.
“신이시여. 이 세상에 자리 잡은 주신 이시여.
부디 홀로 고독히 떠 있는 별을 불쌍히 여기소서.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그가 그러했듯, 희생하고자 했던 성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감히 묻습니다. 신께 답을 구합니다.
그는 무사히 돌아갔습니까. 희생의 티끌만한 대가라도 돌려받았습니까. 마음의 평온을 얻었습니까.
스스로를 용서하였습니까. 최선을 다하였다 생각하십니까. 적어도 저희는 그리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계에서 온 신이시여. 감히 바라노니.
자기 자신을 여느 아이들처럼 소중히 여겨 주소서.“
그 기도가 어쩌면 닿았을까. 그는 저 먼 곳으로 떠났으니 저희의 답이 도착하려면 몇 억 광년이 걸리련지. 알 수 없었다.
“샌님, 저기 좀 보십쇼.”
“이봐, 저거 깜빡이는데?”
…아니, 알 수가, 있나?
별을 바라보고 있던 데스브링거와 마이스터가 반응을 보였다. 그들의 말에 인퀴지터 또한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보았다.
깜-박, 깜박, 깜박,
의사표현을 하듯, 별은 연신 깜빡거렸다. 가끔 길게 깜박이기도하고, 짧게 깜박이기도 하며 불규칙적인 빛을 반복했다.
“……어.”
아니, 정정하겠다. 저건 규칙적인 반복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마이스터는 곧바로 턱을 쥐고 있던 손을 내려 제 가방에 있던 수첩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규칙적으로 깜빡이는 별의 움직임을 기록했다.
‘-...-.--.’
삭삭, 흐르는 목탄 소리에 일행들이 모여들어 마이스터의 수첩을 살펴보았다. 별은 이 깜빡임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다.
“암호군.”
“암호네요.”
“무슨 의미인지 아는 사람?”
“난 모르네만…. 이 해석본을 갖고 있는 자는 알고 있네.”
아크메이지의 답에 일행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베르세르크도 얼핏 들어 본 적이 있다. 말을 할 수 없을 때, 멀리서 신호를 전해야 할 때, 손가락을 두드리거나 빛을 깜빡여 보내는 암호였던 것 같다.”
“그래, 이곳에서 마을까지 얼마나 남았나?”
“걸어서 하루하고도 반나절, 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야영해야 겠군요.”
“그럼 이곳에서 짐을 푸는 것으로 하지.”
이렇게 탁 트인 곳에 천막을 친다니, 혹여라도 악마의 공격을 받는다면 위험해질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그리 생각한 인퀴지터는 뒤늦게 깨닫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더 이상의 악마는 없었다.
그래, 더 이상 악마와의 전투는 없을 것이다.
근처 하천에서 물을 떠오고, 천막을 꺼내는 아크메이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더 이상의 악마는 없다.’
허면 악마기사 또한, 더 이상 없다.
인퀴지터는 무덤을 세우듯, 인동 덩굴이 자라나기 시작하던 곳에 회색빛의 성검을 암석 위에 꽃아 넣었다.
푹, 날카로운 검이 치즈를 자르듯 깊숙이 박혀 들어가며 말린 장미색의 보석이 달린 손잡이만이 땅 위에 남았다.
그날 밤, 일행들은 천막의 지붕을 굳이 덮지 않고 깜빡이는 북두칠성을 자장가 삼아 드러누웠다.
별의 깜빡임은 일출이 떠오를때까지 계속되었다. 태양빛에 가려져 사라져 갈때까지, 일행들은 계속해서 그 별을 바라보았다.
애써 천막을 쳐 노숙 준비를 해놓았음이 무색하게도, 북녘을 향해 누운 채 잠에 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날이 밝아 일행들이 모두 일어났을 때, 암석에 꽃혀있던 성검은 온데간데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
「이젠 어찌하실 겁니까?」
제 앞에 경배하듯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루인이 말했다. 나는 겸연쩍은 낯으로 고개를 돌리며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저리 숭배하는 눈빛은 조금 부담스러운데.
나는 구석에 찌그러져 투덜대며 돌멩이나 걷어 차대는 메피스토를 바라보았다. 오히려 저쪽이 상대하긴 훨씬 덜 부담스럽다.
“이봐, 메피스토.”
‘…….’
나는 부러 놀리듯 그에게 시비를 걸었다. 루인과 둘만 이야기도 할 겸, 쟤는 멀리 보내놔야 할 성 싶다.
“왜 답이 없어, 메피? 화났나? 또 애처럼.”
‘…뭔데, 왜 부르는데.’
“가서 아이스크림 사와.”
‘내가 왜.’
“소멸하기 싫다는 거 억지로 붙들어 줬더니 이러기야? 널 어디에 쓰려고 내가 널 살려뒀겠어? 이런 잔심부름이나 하라고 살려냈지.”
‘X발!’
메피스토가 분통을 터뜨리며 저 멀리 돌멩이를 걷어찼다. 돌멩이는 끝없는 공허 속으로 떨어져 내려 지옥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힘이 넘치네.”
어깨를 늘어뜨린 메피스토가 결국 물었다.
‘…뭐 사오면 되는데.’
“나는 메로나. 루인 너는?”
「…….」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대화에 앳된 얼굴이 당황스러울 만치 멍해졌다. 이윽고 빨리 말하라는 메피스토의 신경질적인 다그침에 루인이 당황하며 버벅 거렸다.
「저, 저는 아이스크림 종류에 대해 잘 모릅니다만….」
“그럼 무난하게 월드콘으로 하자. 애들은 대부분 바닐라나 초코 좋아하더라.”
‘내가 X발, 왕년엔 사탄이랑 맞먹었었는데…. 이런 잔심부름 따위…. 젠장!’
“시끄럽고 빨리 다녀와. 너 먹을 것도 하나 골라서.”
‘필요 없어, 이 호구새끼야!’
「…저 버러지가 감히! 이분께 소리 지르지 마!」
메피스토가 비웃음을 흘리며 조롱하듯 모습을 감췄음에 루인이 분통을 터뜨렸다. 저래놓고도 자기 몫의 딸기맛 요맘때를 사올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드시고 나시면…. 돌아가실 겁니까?」
“넌 내가 그렇게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어? 아까부터 그 질문만 반복하는 구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많이 고생하지 않으셨습니까.
애써 삼킨 뒷말을 짐작한 내가 가볍게 미소지었다.
“물론 돌아가고 싶지. 나 이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며?”
「…그렇습니다. 생전 이룩하신 업적으로 보건데, 원래 이 세계에 자리잡고 있던 주신을 누르고 새로운 종교가 창시될 정도로 많은 신성을 쌓으셨습니다. 그 검에 함께 갇힌 저와 그 버러지까지 함께 격이 오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물론 내 신성에 비해 루인과 메피스토의 격은 한 없이 낮다. 특히 메피스토펠레스는 워낙 생전 이룩한 죄업이 깊고 깊어, 이런 잔심부름이나 해야하는 처지가 되어 오히려 악마 일 때보다 격이 더욱 하찮아졌지만 서도 말이다.
하지만 전능할 정도로 쌓인 신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집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인.”
「…예?」
“진성 게이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 뭔 줄 알아?”
사뭇 가벼운 어조로 물었음에도, 곰곰이 생각하던 루인이 조심스레 답했다.
「게임을 해본 적이 없어서 쉬이 짐작가진 않습니다만…. 최종적인 목표는 ‘클리어’ 아닙니까?」
정론이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조금 다르다. 이번 판을 한 번 ‘클리어’ 해보니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것도 맞지. 하지만…. 나같은 게이머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숨겨진 시크릿 엔딩에 공략도 보지 않고 우연히 도달했을 때야.”
「…….」
“그 숨겨진 엔딩이 해피엔딩이라면 더욱 좋겠지. 뿌듯하고.”
이젠 너무 멀리 와버렸지만, 나는 초반, ‘영웅전설’에 로그인 했을 때의 목적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기로 했다.
나는 게임을 즐기기 위해 이 세계에 접속했다.
기껏 과금까지 해서 디럭스 에디션까지 구매했더니 정작 이런 고생이나 시키고 말이야. 과금 유저에게 시크릿 엔딩을 볼 자격 정도는 있을 것이다.
나는 손가락을 부드럽게 움직여 천천히 시간을 과거로 돌렸다. 미래의 내가 저지른 사건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갈 참이었다.
인퀴지터의 작열통은 거둬내 휴지통에 내버리고, 신성이 허락하는 한에서 끝까지 과거로 되돌아갔다.
「어어, 이러시면…!」
“…….”
옆에서 다급한 루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알아. 이 이상 신성을 쓰면 되돌아가지 못한다는 것 쯤은.
기왕 이렇게 된 것 끝까지 해보자. 나는 몇 십년 전에 존재했을 동부지역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직 파괴되지 않은 루인의 고향이 보였다. 이름이 헷갈려서 미안했던 이리나와 아서, 손 윗 누이 한 명. 그리고 그들의 부모님.
전부 다 살아있었다.
과거의 메피스토펠레스가 동부지역을 막 습격해오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타이밍을 실수하지 않기 위해 나는 집중했다. 악마가 방심한 사이의 빈틈을 노려야 했다.
나는 메피스토펠레스가 자신의 그릇을 찾는 데에 혈안이 되어, 눈에 뵈는게 없어질 정도로 이성을 잃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알맞은 컨트롤로 신성을 조작했다.
그러다보니 향수가 올라왔다. 형체만 없다 뿐이지, 조작하는 느낌이 퍽 키보드와 마우스랑 비슷해서 그런가.
그리고,
“지금.”
나는 내 본신을 지상을 향해 내리꽃았다. ‘본신’이란, 그래, 내 몸이 맞다. 내 척추와 오른 눈으로 이루어진 회색빛의 성검 말이다.
그와 동시에 남은 신성력을 그러모아 과거, 기사 견습생의 손등에 용사의 문양을 새겼다. 인퀴지터의 손등에 있던 모양을 따라해 보았는데, 그대로 새겨졌을 지는 잘 모르겠다. 대충 비슷하게 만들어 내면 되겠지 뭐.
「이게, 대체, 무슨….」
내 옆에서 경악하며 지상의 풍경을 내려다보던 루인이 흠칫, 비틀거리는 내 몸을 바로 지탱해주었다.
“…아.”
자연스레 고개가 아래로 떨구어 지는 것을 루인이 받쳐주었다.
신성을 전부 소모해서 그런가. 갑자기 졸려왔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의식이 가물 해지기 시작했다.
「자, 잠드시면 안 됩니다! 잠깐만요, 아직 제대로 된 감사 인사도 못했는데…. 신이 잠들면, 그건 소멸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고요! 왜 신성을 남겨두시지 않고 모조리 사용하신 겁니까! 어째서….」
“…….”
물기어린 목소리를 뒤로 하며 나는 애써 감기는 눈을 치켜올려 스스로가 저지른 결과를 확인했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
뭐가 그리 웃긴지.
“모두 살았네.”
「…….」
신에게 선택받은 용사는 살아남아 성검을 쥐고 제 가족을 지켜냈다. 그리고 나라 전역에 제 이름을 떨쳤다.
“잘됐어. 잘 된 거 맞지?”
「그만 말하세요. 더는 무리하지 마세요….」
“싫은데. 내가 이번엔 제대로 된 선택을 한 게 맞는 거겠지? 내가 실수하지 않았다고 말해줘.”
「…당신은 옳습니다. 언제나 그랬어요.」
“…….”
확신어린 어조에 안심이 된 내가 졸린 눈을 깜빡이며 지상을 바라보았다.
용사를 도울 일행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용사의 문장을 받지 않아 학대를 당하지 않고 자란 인퀴지터, 친구를 잃지 않은 데스브링거, 사랑하는 이가 죽지 않은 아크메이지, 누이가 죽지 않은 베르세르크. 어릴 적 갇혀 지내지 않은 마이스터….
제 한 명의 값으로 너무 많은 이들이 행복해지고 말았다. 그러니 내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겠냐고. 너희들이 웃는데. 무척이나 행복하다는 얼굴로 미소 짓는데.
“…졸려.”
지상에서 들려오는 친숙한 웃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나는 눈을 감았다. 언뜻 제 볼 위로 짜디짠 소금물이 떨어진 것 같았다.
이렇게 기쁜 날 왜 울고 있니 아이야.
그만 눈물을 그치렴.
***
바스락, 인퀴지터가 제 시야를 방해하는 나뭇잎을 손으로 거두며 앞으로 전진 했다. 뒤쪽의 일행이 불편해 할까, 허리춤을 가로막은 덤불은 메이스를 휘둘러 치워냈다.
“체력은 괜찮으십니까? 인퀴지터.”
“예, 아직 멀쩡합니다. 저보다는…. 먼저 뛰쳐나간 분이 걱정이 됩니다만.”
“걱정 마십쇼, 샌님. 나리가 웬만큼 강합니까? 이런 들짐승밖에 없는 숲속에선 홀로 움직여도 안전할겁니다요.”
“그렇긴 하다만….”
“아, 저기 전우가 보인다.”
베르세르크가 검지를 치켜들어 저 멀리 있는 회색머리의 기사를 가리켰다. 손가락이 향한 곳을 확인한 일행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야이 근육덩어리야! 한참 찾았잖아.”
“급한건 이해하겠네만…. 이 늙은이를 봐서 살살해주게.”
마음에도 없는 투정을 부리며 일행들이 기사에게 가까이 섰다. 기사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일행을 보고 반응했다.
“…아. 죄송합니다. 조급한 마음에 그만….”
“괜찮습니다, 벤퀴셔. 그보다, 성검은 여즉 그 상태인 겁니까?”
회색 머리의 기사가 들고 있는 성검은 계속해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정확히는 손잡이의 옅은 장미색의 보석이 박혀있는 곳에서 흘러나오는 찬란한 신성력의 빛이었다.
“…예. 오히려 더욱 심해졌습니다. 아까보다 빛이 더욱 밝군요.”
“이상합니다. 예전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지 않습니까.”
“…….”
침묵을 지키던 벤퀴셔가 또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쩐지 초조해 보이는 얼굴에 일행들은 걱정스러운 낯빛을 띄었다.
기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듭니다. 빨리 찾아야한다는 조급한 마음도 들고요.”
“악마의 농간일지도 모릅니다. 마기는 느껴지지 않습니까?”
“네, 전혀…. 적의나 살기 같은 기척 또한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데스브링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생각해보니 숲에 들어오기 전, 이런 정보를 들었습니다만.”
“뭔가?”
“음…. 몇 달 전에 기이한 현상이 이 근처에 있었더랍니다. 근처의 활화산이 분출해서 주민들이 전부 물가 쪽을 향해 대피했었다고요.”
“큰일이었군. 그런데 뭐가 기이하다는 거지?”
“그것이…. 애써 대피했건만, 마을에 입은 피해가 전혀 없었다고 하더라굽쇼. 이상하리만치 용암이 갑작스럽게 식어 검은 유리로 변해, 마을에 보호하는 반원의 보호막위를 용암이 덮친 것처럼. 아주 볼만한 풍경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이후 산사태나 지진처럼 뒤따라오는 피해도 전혀 없었다 하고요.”
“그건…. 확실히 기이하군.”
“예, 게다가 용암이 워낙 급격히 식은 덕분에 엄청 값나가는 유리 재료가 되었다나. 그래서 몇 개월 전보다 마을이 훨씬 풍족해졌다고 합디다.”
“그건 다행인 일이군. 아이들이 유독 많은 마을이니, 풍족하면 풍족할수록 좋지 않은가.”
“예, 뭐…. 이상하긴 합니다만, 결과적으론 잘 된 일이죠?”
“…….”
그들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벤퀴셔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무언가를 발견한 듯, 앞으로 뛰어나갔다.
“벤퀴셔!”
“우왁, 기사 나리, 또…!”
하지만 다행히도, 일행들은 이번에는 얼마 달리지 않아 기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용사보다는, 다른 곳을 먼저 향했다.
검고 투명한 유리 안에 웬 사람이 갇혀 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죽은 겁니까?”
“…….”
벤퀴셔는 답하지 않았다.
챙그랑…!
다만 성검을 휘둘러 흑요석을 깨뜨리니, 거짓말처럼 쉽사리 유리가 부서지고 안에 갇혀있던 사람의 모습이 바깥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윽고 스르륵, 중력의 영향을 받고 갇혀 있던 사람의 몸이 힘없이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어어…!”
“우왁…! 괜찮으십니까요?!”
“괜찮습니다.”
하지만 의식을 잃은 사람의 머리가 땅에 부딪히기 전, 벤퀴셔가 그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갈색빛이 도는 흑발에 훌쩍 키가 크고, 얼핏 예민해 보여 더욱 첨예해보이는 인상의 이였다.
분명 처음 보았음에도, 용사는 어쩐지 눈앞의 이가 낯이 익었다.
그건 마치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을 드디어 만난 기분과 같았다 텅 비어서 있는 줄도 몰랐던 마음 한 켠의 비어있던 공간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살아 있어.”
저도 모르게 벤퀴셔가 중얼거렸다.
품에 누운 이는 따뜻했다. 천천히 오르내리는 가슴, 사후경직이 일어나지 않아 부드러운 팔 다리가 그의 생명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저 안에서 어떻게 살아 있었던 건지….”
“아…! 정신이 드십니까?!”
“……?”
이윽고, 잠들어 있던 사람이 부스스, 눈을 떴다. 평범하게 검은 빛이 감도는 갈색의 동공이었다.
그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다가, 이내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일행을 보더니 화색을 띄었다.
유리질로 이뤄진 흑요석 속에 갇혀 있었던 사람치고는 태연한 반응이었다. 마치 침대에서 자다 일어난 사람마냥,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지 모르는 기색이었다.
“……,”
무슨 생각인지, 그저 빙그레 미소 지을 뿐.
예민해보이던 첫 인상과는 달리 웃으면 유독 순해지는 낯을 바라보며, 벤퀴셔는 여즉 앉아 있던 그에게 손을 뻗어 말을 걸었다.
“괜찮으십니까?”
“…….”
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반응에 혹시 몰라 되물었다.
“…혹시, 말을 못하십니까?”
“…….”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마침내 소리 내어 참으로 경쾌히도 말했다.
“안녕.”
“…….”
“하하…. 이 말을 가장 처음으로 하고 싶어서 그랬어.”
“…….”
답답한 숨을 터뜨리듯 다정한 어조의 낯선 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모스부호는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할지, 없을지도 모르면서 전해질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작별인사를 건네는 내 심정을, 너희는 알았을까.
그러니 이리 직접 만나게 되어, 다시금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다만 중요한 것은, 더 이상의 연기 없이 마음 편하게 너희 앞에서 웃을 수 있다는 사실. 그 하나뿐이다.
그러니 이건 숨겨진 해피엔딩의 작은 이스터 에그에 불과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