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간감각 없이 무의식속을 유영하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다.
“…….”
마침내 현실에서 의식을 되찾은 것이다.
내게 현실이란 여태까지는 가족과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캡슐 바깥이었으나, 어쨌든 이 세계 또한 내가 선택한 세계이니 지금은 현실이라 부르는 편이 낫겠지.
헌데.
…찰그랑.
“…….”
생각해보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눈을 뜨려했으나 무언가에 짓눌린 눈꺼풀이 움직이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얼굴에 감겨있는 것을 떼어내려 손을 움직였으나 쇠사슬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왔다.
“…후으.”
얕은 한숨을 내뱉자 떨리는 숨결에 불안이 묻어나왔다. 정적 속에서 공기가 흐르지 않는 지하실 특유의 갑갑한 냄새가 났다. 물이 똑, 똑 떨어지는 소리만이 공동 안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그래. 진정하자. 그나마 목에 뭔가가 걸려 있지 않으니 최악은 면한 편이다. 그마저 묶여 있었다면 차마 정신을 차리기가 힘겨웠을 것이다 .
“…….”
나는 가만히 앉아서 주변의 기척을 느꼈다. 그러자 아무도 없는 빈 공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알 수 있었다.
‘…괜찮아. 코는 막혀 있지 않아. 숨은 쉴 수 있어.’
쉴 수 있어.
나는 계속 떨려오는 숨을 차분하게 고르려 노력하며 의식을 잃기 전 상황을 떠올렸다.
‘판데모니엄은 어떻게 됐지? 사상자는? 내가 묶여있는 걸 보면 예전처럼 격노라도 터진 건가?’
누구든 좋으니 내게 와서 상황을 좀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아니, 악마를 묶어놓고 경비병 하나 안 세워놓는 게 말이 돼? 아니면 그럴 여력도 없을 정도로 도시가 엉망인거야?
치솟는 의문과 불안감에 가볍게 어깨가 떨리던 순간,
“…!”
탁 탁 탁, 가볍게 뛰는 발걸음 소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점점 커지는 걸 보니 내게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다. 누구일까.
“…세상에! 나리…!!”
“…!”
익숙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타이밍도 좋지. 오래 방치될 것 같으면 그냥 수면 시스템을 통해 다시 잠들어야 하나 생각하던 참이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한 고기만두가 내 입에 물려진 무언가를 빼주었다.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다.
“…후우.”
“저, 정신이 드십니까요? 제 말은 들리시고요?”
“…….”
자유로워진 입이 반가웠으나, 나는 곧바로 답할 말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반드시 물어봐야했다. 그게 옳았으므로.
고기만두가 재빨리 손목에 감겨있던 쇠사슬을 자르고,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 또한 벗겨주었다.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보이니 사뭇 안심이 되기도 했으나, 그만큼 불안감 또한 커졌다,
“…….”
나는 데브의 걱정 어린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입을 열었다. 며칠이나 지난건지 상당히 건조하고 갈라진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상황은.”
“…….”
“얼마나, 죽였지?”
“무슨….”
“내가, 얼마나 죽였지?”
“…!”
데브가 눈을 크게 뜨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 모습에 상황이 예상 보다 더 심각하리라 느낀 내 얼굴이 빳빳히 굳었다. 척추 선을 타고 차가운 핏물이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요.”
“……?”
아무도 죽지 않았다면 왜 그런 표정인건데. 나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짓씹듯 말했다.
“…거짓을 고하지 마라.”
“거, 거짓말이 아닙니다…! 아, 젠장. 이번만큼은 진짜 아닙니다요. 나리 몸속의 그 악마… 가 또 난동을 부렸다거나 하는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고요!”
“…그럼,”
찰그랑,
나는 답을 구하듯 내 손목에 묶여 있었고, 이제는 잘린 채로 늘어진 쇠사슬을 흔들어보였다.
진심으로 억울해 보이는 데브의 눈빛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왜 묶여 있었던 건데? 내 얼굴과 아직 흔들리는 쇠사슬을 번갈아 쳐다보던 데브가 갑작스레 제 허리춤에 차고 있던 부정검을 꺼내들었다.
‘……!’
그 칼을 보자 무심코 과거의 일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고, 다행히도 고기만두는 내 작은 경계를 눈치 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그는 조심스레 천천히 칼을 꺼내더니 내 얼굴에 반사된 면이 향하도록 비추어 주었다.
“어…. 급한 대로 이렇게라도 확인하십쇼.”
“……!”
부정검의 매끈한 면을 정면으로 바라본 내 눈이 크게 홉뜨였다. 이번만큼은 컨셉 유지니 뭐니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놀란 것이 맞다. 경악스러움에 입술마저 조금 떨린 것 같았다.
나는 데브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날에 반사되는 내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이게, 무슨.”
“젠장. 저희도 구속은 최대한 막아보려 했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요…. 워낙 모습이 급변한 터라 아무도 이유를 모르고, 원인도 모르고. 신전에서 내놓은 추측이라곤 나리의 팔에 깃든 악마가 완전히 몸을 잠식한 게 아니냐는 부정적인 의견이 대부분인데, 지난번 아유 힌에서의 전투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양새라서, 그… 법사나리가 힘써주고 계시긴 합니다만.”
“…….”
옆에서 데브가 여러 가지로 자세히 상황설명을 해주었으나 안타깝게도 나는 제대로 설명을 들을 정신이 없었다. 그저 인상을 찌푸리며 믿지 못하겠다는 듯 제 얼굴을 왼손으로 더듬어볼 뿐이었다.
“…나리?”
그제서야 내가 정신을 놓고 있다는 걸 깨달은 고기만두가 설명을 멈추었다.
“…….”
그야, 제 몸이 온통 보석으로 변했다면 누구라도 놀랄 것이다.
‘…아니, 보석이라기엔 좀 다른데. 광물인가? 아니면 유리?’
거울 속에 비치는 제 몸은 광물이 잘 연마된 보석이라기 보단, 곡괭이로 갓 캐내어 암석에서 떨어져 나온 광석과도 같아 보였다.
아니, 정정하겠다. 더 자세히 살펴보자니 광석 또한 아니다.
내 모습은 보석이라기엔 그 모습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다채로운 색채가 부족했고, 그렇다고 광물이라 하기엔 투박함이 없었으니까.
마치 유리를 사람으로 세공하고자 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틱, 팅...!
손바닥으로 볼을 가볍게 치자 인간의 피부에서 날 리가 없는 날카로운 소음이 귀를 파고들었다. 이거 제대로 움직일 수는 있나?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내가 부드럽게 손목을 돌리며 두 팔의 움직임을 확인해보았다.
파도가 출렁이듯 검은 손가락을 순서대로 하나씩 구부리자 그것은 기괴한 관절 인형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내부의 구조가 궁금해질 정도로 거동에 별다른 제약이 없었다. 이런 모습은 좀 안드로이드 같기도 하고, 하여튼 인간 피부 특유의 부드러움과는 사뭇 다른 단단함이 느껴졌다.
끼기긱…!
“쯧.”
주먹을 콱 움켜쥐자 칠판을 긁는 것 같은 어긋난 마찰음이 들려와 혀를 차며 곧바로 힘을 풀었다. 나는 변한 신체의 기능을 망설임 없이 확인해나갔다.
몸의 모든 곳이 제 뜻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신경계나 뇌 기능에도 이상이 없다는 뜻이었다.
지하실의 옅은 불빛에 비춰진 움직이는 검은 보석이 붉은 빛을 쨍하니 반사했다.
‘...과연, 이래서 묶어둔 건가.’
변한 모습을 확인하자 비로소 납득할 수 있었다.
누구라도 이렇게 모습이 기괴하게 바뀌었다면 일단은 의식을 차리기 전까지 구속해둘 것이다. 오른손은커녕, 전신의 피부가 검게 물든 데다 그 피부마저도 인간 본연의 피부라기엔 이질감이 차고 넘쳤으니.
“이건….”
그래. 더도 덜도 않고 검은 조각상 같은 모습이었다. 머리카락부터 눈알, 손톱, 발가락, 어느 하나 빠짐없이 단단하다. 심지어 속눈썹마저도.
‘안구도 단단한데, 이제 속눈썹은 필요 없지 않나? 제 기능을 할 필요성이 없어졌는걸.’
그리 실없는 생각을 이어가다가 문득 제 몸의 단단함이 궁금해졌다. 나는 반쯤은 충동적으로 옆에 있는 벽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팔꿈치를 허리 뒤로 당겨 최대한 반동을 실은 뒤 옆으로 뻗자,
쾅!
“우왁, 나리?!”
“…….”
옆에 있던 데브가 내 행동을 보곤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결과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바스락,
돌벽이 내 주먹 모양 그대로 움푹 파여 있었다. 손을 거두자 바스라진 돌가루가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벽에 부딪힌 손을 쥐었다 펴보니 멀쩡했다. 이 정도면 전과 비슷한 무력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럼 이건?’
스륵.
“나, 나리?! 지금 뭐 하시는…!”
나는 인벤토리 안에 보관해 두었던 단검들 중 하나를 꺼내 검 집에서 뽑아들었다. 그리곤 데브가 말을 끝마치기 전에 망설임 없이 제 팔을 향해 뾰족한 날을 내질렀다.
까앙!
“흐앜!”
“…쯧.”
불꽃이 튀는 동시에 동강난 단검의 날이 공중으로 튀어나갔다. 고기만두가 있는 쪽으로 날아가지 않아서 다행이다. 앞으론 좀 더 신중하게 실험해봐야겠는데.
그런데, 데브가 꼬리가 펑 터진 상태로 내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이 패닉에 젖어있었다.
“하, 진짜…! 저, 저 심장 떨어질 뻔 했습니다요?! 나리, 이제 그만,”
데브가 발발 떨리는 손을 내뻗어 나를 말리려 들었으나, 나는 아직 확인해볼 것이 하나 남아 있었다.
트루 투헨더.
스르릉….
내가 인벤토리에서 기다란 장검을 꺼내자 데브가 졸도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괜스레 미안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당연히 제일 먼저 확인해야 할 일이 아닌가?’
내가 또 이지를 잃기라도 하면 제압할 수단은 남아 있어야 할 텐데 말이다.
그리 생각하며 태연한 얼굴로 투헨더의 날을 자신을 향해 세우자, 참다참다 못한 고기만두가 갑작스레 소리를 빽 질렀다.
“으악!! 그만 좀 하라 구요, 제발! 나리가 의식을 잃고 있던 동안 제가 얼마나 걱정 했는데, 제가 일어나자마자 나리 자해하는 거나 보려고 여기 온 줄 압니까?! 그 검 좀 치우십쇼, 제발!”
“…….”
그러곤 내게 가까이 다가오며 간곡히 소리치는데, 무시하려 했더니 아예 장검의 날을 맨손으로 부여잡아 버렸다. 나는 다급히 검의 움직임을 멈추며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네놈.”
“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말려야겠습니다. 굳이 이렇게 까지 확인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애초에 나리 몸이 부서지면 다시 고칠 수 있다는 확신도 없으시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언제 깨질까 겁나는 모습인데, 그렇게 쓰레기 다루듯 자기 몸에 칼 좀 그만 꽃아 넣으라고요, 좀!!”
“…….”
‘…아.’
아무래도 데브는 내가 혹여 깨질까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으므로 내심 헛웃음을 흘리며 생각했다. 값비싼 유리잔도 이렇게 받들어 모시진 않을 것이다.
‘쉽게 깨진다면 제압이 용이 할 테니, 오히려 반가운 소식 아닌가.’
하지만 내 판단과는 다르게 고기만두의 표정은 온통 나를 향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젠 빈말로도 인간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내 모습은 이질적으로 보일 것이 분명함에도.
그나마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나.
고민을 이어가며 데브의 얼굴을 살피자, 그의 표정은 정말로 절박해보였다. 무슨 트라우마라도 자극 받은 듯 핏기가 가신 앳된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나로써는 도무지 왜 이렇게 까지 말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만약의 상황을 위한 경도 테스트는 당연한 거잖아. 왜, 그 보X의 나라처럼.
“…놔라.”
“나리, 제발….”
“…….”
‘그래도… 굳이 애 앞에서 이럴 필요는 없었지.’
생각해보니 내가 조금 성급히 행동했던 것 같다. 나는 부러 한숨을 크게 쉬며 재차 말했다.
“…알겠으니, 놔라.”
“…….”
그제야 데브가 영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으로 머뭇머뭇, 칼날을 쥐고 있던 제 손을 놓았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신경 써서 일부러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날에 붉은 빛이 조금 비친다.
“...쯧.”
나도 모르게 혀를 차며 생각했다.
내가 이 검으로 설마 배라도 찌르려고. 그저 가볍게 팔에만 날을 부딪혀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절박하게 말려대다니. 도무지 지금은 무리다. 나중에 혼자 있을 때 시험해볼 기회가 있겠지.
그래, 우선은 도시 상황부터 들어야겠다.
몸의 변화에 대한 파악은 나중이다.
우리는 지하실의 바깥 통로를 향해 걸었다.
“의무병! 늑골 골절 한 명!!”
“붕대 남은 거 없어요?!”
“누가 가서 삶은 천 좀 찢어와!!”
주변의 다급한 상황을 지나치며 나는 침묵을 지켰다. 밖으로 나오기 전, 데브가 준비해온 망토를 건네주었기에 눈에 띄지 않아 다행이었다.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유리의 반짝임은 그림자에 가려져 밖으로 빛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오늘이 그믐이라 했던가.
마법등도 개수에 한계가 있었다. 창백하고 푸른 어둠에 물든 중상자들의 낯빛이 더욱 심각하게 보여 마음이 가라앉았다.
“샌님은… 아직 부상이 심해 깨어나지 못하고 있고, 법사 나리는 간이 병상에서 환자들을 치료하고 계십니다요. 투사 나리는 천만다행으로 멀쩡히 일어나셔서 피해 복구를 돕고 있고요.”
“…….”
나는 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먼저 나서서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준 데브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느꼈다. 그리고 일행 중 누구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잠깐, 마이스터는?’
정신없는 상황에 잊고 있었지만 그 또한 이 도시의 주요 인력이었다. 도시 복구에 누구보다도 큰 도움이 될 터.
“…대명장은.”
“예? 그 재수탱… 아니, 크흠. 대명장 이라면, 한 쪽 다리에 타박상 빼곤 멀쩡합니다요.”
“…….”
나는 겉으로 티 나지 않게 그 사실을 반복하여 읊조렸다.
…다리, 타박상.
‘…그래. 단순한 타박상.’
그나마 십자인대 파열까진 아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나는 오른 다리에 의식적으로 힘을 주어 걸었다. 이윽고 조용한 내게 고기만두가 조심스레 질문을 건넸다.
“우선… 어디까지 기억하십니까?”
“…….”
사실, 그동안 나 많은 일이 있었어. 힘들다 진짜….
하지만 이 말을 그대로 읊을 수는 없었으므로, 기억을 정리한 뒤 사실만을 전했다.
“…신호탄을 쏘아 올리던 때까지.”
“…….”
내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기만두의 숨이 조금 흐트러졌다. 그는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부러 태연한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리가 정신을 잃으신 뒤에, 그러니까... 샌님과 저, 그리고 그 대명장까지 합류해 대악마가 있는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저희가 연구실을 거쳐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샌님은 대악마와 교전 중이었고... 저희는 나리가 갇혀계신 곳으로 추정되는 검은 봉인석을 향해 대명장의 무기를 겨눠 공격을 날렸는데,”
데브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는 잠시 동안 말하기를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가 심호흡을 한 뒤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리가 갇혀 계시던 봉인석이 부서지고, 나리가 그 속에서 두 발로 걸어 나오셨습니다요. 바로 지금 그 모습으로요. 처음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는 듯 제 몸을 비틀어대더니, 무슨 뼈나 바위가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니 관절이 생겨나더군요. 그 뒤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저와 기절한 대명장, 샌님이 웬 악마에게 이동 당하고, 그 모습이 된 나리께서 혼자 탐욕을 상대 하셨으니까요. 전투가 끝난 뒤 듣기로는, 그 모습으로 홀로 쓰러져 계셨다기에 신전에서 묶어두었고요. 개자식들, 위험분자를 환자들과 함께 둘 수 없다는 이유로 잘도 그딴 지하실에…. ”
“…….”
“…크흠, 어쨌든, 더 궁금한 게 있으십니까?”
“…….”
아마 탐욕의 저주를 막아내기 위해 내게 깃들어 있는 악마가 힘을 좀 쓴 모양이지. 그 덕분에 민간인에게까지 해를 끼칠 힘이 남지 않고 쓰러진 것은 다행인 일이다.
‘지금 그게 더 중요하냐?’
“…!”
불시에 머릿속에 들려온 목소리에 내 몸이 흠칫 떨렸다. 기민하게 이상을 눈치 챈 고기만두가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리?”
“신경 꺼라.”
나는 데브의 불안한 시선을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럽게 목소리가 계속 들려와서 표정 관리가 어려웠던 탓이다.
‘친애하는 그레트헨... 너를 호구 새끼라고 내 직접 명명했어야 했는데 말이지.‘
「닥쳐, 쓰레기 자식아.」
하지만 이 말만큼은 반박해야겠다.
호구라고 불러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더 이상 레이드 보스 몹이 되는 건 내 쪽에서 사양이라서 말이지.
기억이 없더라도 그건 퍽 끔찍한 기분이었다. 그때는 죽으면 로그아웃 되거나, 리트 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이라도 있었지. 이젠 죽으면 말짱 꽝이라는 걸 알아버렸지 않은가.
내가 설정한 성격에 맞춰 제 죽음을 구걸해야하는 일이란, 그래. 생각보다 끔찍했다.
‘김치만두가 반대해주지 않았다면, 아마….’
이마저도 지금의 내가 한 육신에 함께 갇혀 있는 두 존재를 깨닫고 조금이나마 상황을 파악한 덕에 할 수 있는 생각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이토록 살고 싶었다.
다 그만두고 죽어서 쉬고 싶다는 생각조차도 더 나은 삶을 원한 발버둥이었건만.
그래, 누구 씨들이 대답이 없었던 덕분에 그동안 그걸 잊고 있었지 뭐야.
「…….」
내 생각을 읽고는 아마 본래의 악마기사… 였을 이가 잠시 침묵하다가 알려주었다.
「...루인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
나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폐허, 유적지라니. 어른이 될 기회가 주어지지 못했던 아이에게 붙이기엔 부적절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우선은 대신 지칭할 이름도 궁하니. 알겠어, 루인.
‘나는 메피스토라고 부르던가.’
나는 악마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거 알아? 그런 방백조차도 내게는 전부 들린다는 거. 아, 읽힌다고 해야 하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닥쳐.」
장난스레 속살대는 목소리에 팔뚝에 소름이 올라왔다. 나는 애써 침묵을 지키다가 내 주의를 간신히 데브에게로 돌리며 물었다.
“…탐욕은, 죽었나?”
“예. 확실히 죽었습니다요. 그건 신전에서 공인했습니다. 하지만….”
일러두자면, 저주를 푸는 데 가장 간단한 방법은 마법을 건 시전자를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탐욕이 죽음에 이르렀음에도 내 저주가 풀리지 않는 것은…. 어쩌면 이 모습 그대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일지도 몰랐다.
“…….”
「…….」
‘…….’
두 존재 역시도 나와 함께 침묵을 지켰다.
‘지랄 맞은 상황이긴 하네. 우리 함께. 안 그래?’
…이제와 친한 척 해봤자 내키지 않는데.
물론 벌써부터 해주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할 수 있는 방법은 전부 해볼 작정이다. 이 모습이라면 어디를 가든 자유롭게 운신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뭐 아무도 없는 산속에 홀로 틀어박혀 살 작정이 아니라면 말이다.
…아냐, 이런 생각은 그만하자.
나는 애써 가라앉으려는 기분을 끌어올리며 더 이상의 고민을 멈췄다.
‘그래, 제발 멈춰줘라. 바닷물에 다리가 반쯤 잠겨서 어지간히 축축하거든.’
「이분께 불평하지 마, 버러지!」
나는 내 슬픔의 원인이 너희들이라는 사실을 굳이 일깨워주진 않기로 했다.
…뭐, 아무튼.
이제는 내가 한 선택에 책임을 질 차례였다. 나는 좀 전의 대화를 복기하던 것을 멈추고,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기로 했다.
“지금 당장 내가 필요한 곳이 어디지?”
“아... 아마 투사나리 쪽 일겁니다요. 저기 해안가 쪽에...”
“확인했다.”
“아, 나리! 잠깐…!!”
콰앙!!
땅에 균열이 이는 동시에, 큰 충돌음이 귀를 때리며 사람의 발자국만한 구멍이 바닥에 남았다. 나는 땅을 박차고 휘영청 곡선을 그리며 뛰어올랐다. 어두운 그믐 임에도 달빛을 받아 까맣되 하얗게 빛나는 피부의 색체는 마치 하늘에 떠 있는 여느 별들과 다를 바가 없어보였다.
이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리는 모양새는, 어쩌면 마지막 빛을 발하며 추락하는 유성을 닮았으리라.
***
도시의 3분의 2가 파괴되었다.
악마기사를 제외한 모든 동료들은 그리 생각했다. 도시의 3분의 1이라도 지켜낸 것은 오롯이 그의 무력 덕분이었다고.
하지만 정작 그 일을 해낸 장본인은 시민들의 두려움과 병사들의 괄시를 받았다. 그는 이리저리 도움이 급한 곳으로 끌려가 가장 험하게 굴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에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몸이 이렇게 변한 이후로 그는 어떤 피로나 이상증세도 느끼지 못했던 탓이다.
“…….”
하지만 정신은 다른 문제였다.
베르세르크는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연약한지 알고 있었다. 육체가 얼마나 강건하든 정신이 무너지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어떤 강자라도 정신적 두려움 앞에선 무력을 뽐내지 못한다.
베르세르크는 어울리지 않는 새카맣고 단단한 무기질에 미약한 별꽃의 영혼을 담은 듯한 이질적인 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몸의 대부분을 망토로 가리고 있었으나, 소리까지 가리진 못했다.
“…….”
카드득, 까득.
또 시작이다.
잠시 동안 주어진 휴식시간마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불안함을 못견디겠다는 듯 제 목을 연신 손톱을 세워 긁어대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피부도 손톱도 같은 경도로 변해버린 지금, 물리적인 자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신체였으니 말이다.
베르세르크는 다만 침중한 낯으로 그의 행동을 멀찍이 서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말려야 하나. 제가 말릴 자격이 있나. 여느때와 같이 자신의 무력을 살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다가설 자격에 의문을 품을 뿐.
끼이익...!
“……!”
하지만 저건 아무래도 말려야 겠다. 베르세르크는 얼굴을 굳히며 성큼성큼 악마기사에게 다가갔다.
“…기사야.”
“…후우… 흑.”
베르세르크는 제 말을 듣지 못하고 간헐적으로 숨을 몰아쉬는 악마기사에게 다가갔다.
그는 검집에서 뽑아낸 단검의 날로 제 목을 긁어대고 있었다.
끼긱, 끄르륵….
불쾌한 소음과 금속의 마찰에 의해 목에서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검날은 그의 목에 한 치의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하지만 베르세르크는 그것이 말릴 이유가 안 된다고는 생각치 않았다.
“기사야.”
베르세르크가 침착히 타이르며 단검을 쥐고 있는 악마기사의 손목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
그제서야 무심한 눈길이 그녀를 향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호흡이 천천히 정돈 되고, 여느 때와 같이 짐승이 으르렁대듯 성대를 긁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뭐냐.”
“…….”
그가 자신에게 주의를 돌리며 단검을 집어넣자 베르세르크 또한 자연스레 손목을 거두었다. 그리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어조로 말을 맞춰주었다.
“기사야. 나는 일행들을 살피러 간다. 같이 가겠나?”
“…….”
굳이 강요하진 않겠다는 듯, 반걸음 물러서 팔짱을 낀 그녀의 행동이 그 심정을 대변해주었다.
그 배려를 눈에 곱씹다가, 악마기사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
순간 금을 녹여낸 그녀의 눈이 크게 뜨이며 놀라움을 드러낼 정도로 무른 어조가 빈틈으로 새어나왔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1초도 안 되어 순식간에 정리되어 갈무리 할 수 있는 종류의 감정. 그뿐이다.
‘응.’ 이라는 한 음절은 정신이 없던 틈에 무심코 내뱉기엔 너무 간결하고 편리했으니 말이다. 단지 그뿐이다.
‘하이고, 어련하시겠어.’
방금 전까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 또한 찝찝했다. 정신을 좀 더 바짝 차려야했다.
「…괜찮으십니까?」
...응.
확신할 순 없지만, 아마도.
내 대답에 메피스토가 피식, 비웃음 소리를 내었으나 무시했다.
“그래, 그럼 가자.”
삽시간에 태연한 얼굴로 돌아온 베르세르크가 조금은 가벼워진 어조로 말했다.
그에 말없이 앉아있던 바위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르며 기색을 살폈다. 방금은 실수로 나온 말투였으나, 그녀의 태도로 보아 다행히도 나를 악마로 오인하진 않은 모양이다.
하긴, 그랬다면 진즉 예전 오두막에 쓰러져 있을 때부터 나를 공격했어야 함이 옳다. 그래, 버서커나 마이스터 앞에선 긴장을 조금 내려놓아도 될 것 같다. 그리 생각하니 목 주변에 산재하던 갑갑함이 조금은 수그러드는 기분이었다.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굴러가지 않던 머리 또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숲속에서 지저귀는 산새들의 울음소리를 배경음 삼아 생각하기 시작했다.
제 안의 악마가 튀어나왔다는 사실을 목격한 이도, 피해도 없었으니 공식적인 포박의 유지는 막아냈지만, 그렇다고 내 처지가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아직도 두려움 어린 사람들의 시선이 어려웠고, 감내하기 또한 두려웠다.
‘도통 이해가 안 되는 놈이란 말이야.‘
「닥쳐. 저분께 네 이해 따위가 필요할 것 같아?」
그러니 내가 지금 동료들을 찾아가는 이유는 공식적인 내 처우를 결정받기 위함이리라.
내 처우에 대한 결정권중 유일하게 신전보다 앞서는 이는 신이 직접 점지한 용사. 인퀴지터 밖에 없었으니까.
…그래. 지금은 사서 걱정하지 말자. 안 좋은 쪽으로 굳이 주의를 돌릴 필요는 없었다. 좋은 쪽 또한 살필 필요가 있다.
며칠간 버서커와 함께 수해 복구 작업을 도운 결과,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이 몸, 저주 치고는 지나치게 편리하다.
‘…그게 좋은 쪽이야?’
어처구니없다는 듯 묻는 메피스토의 말을 무시하며 계속 생각했다.
산소가 굳이 필요치 않아 어두운 흙속에 파묻힌 사상자를 찾아내기에도 용이했고, 굳이 검으로 방어하지 않아도 어지간한 공격은 전부 단단한 몸이 막아주었다.
물론 그걸 깨달은 과정은 그리 내키지 않았지만.
“…전에 공격받은 등은, 괜찮나?”
“몇 번을 반복해 말하게 할 생각이지? 문제없다.”
버서커의 질문에 지나가듯 무심히 대답한 나는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내 모습을 악마로 오인한 병사 하나가 내 등을 향해 창을 내지른 결과, 쇠로 이루어진 창이 구부러지고 만 것 이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병사가 구부러진 창을 놓치고 바닥에 떨어뜨렸다. 물자 하나하나가 아까운 상황이었기에 나는 그 창을 주워서 다시 곧게 펴준 다음 병사에게 돌려주었다.
그 모든 과정을 목격한 병사가 바닥에 주저앉아 소변을 지린 것만 빼면, 나름대로 별 일 아니었다.
끼이이이이익---
“…….”
그래, 사소한 해프닝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그리 생각하며 나는 애써 금속이 마찰하는 듯한 이명을 내리누르려 애썼다. 몸이 이리 변하기 전까지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예전의 이명은 그저 귀만 시끄러웠다면, 지금의 이명은 몸속이 묘하게 어긋나는 것 같아서 기분이 훨씬 나빴다.
끼기기긱…!
…윽.
몸속에서 유리가 마찰하듯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으.”
그 정체모를 기이하게 뒤틀리는 감각에 숨을 들이 킨 순간,
딱!
“…!!”
삽시간에 이명이 멎었다. 정신이 조금 트이며 맑은 공기가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 차려. 그레첸.’
메피스토가 손가락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내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다. 그 덕분에 시끄러운 소음이 멈추고 주변의 소리가 분명히 들리기 시작했다.
몸이 이리 변한 뒤로 땀이 흐르지 않아서 다행이다. 만약 흘렀다면 식은땀으로 축축해서 매우 찝찝할 것이다.
‘쯧, 이럴 줄은 예상했지만…. 애써서 움직일 수 있도록 조립해놨더니, 그리 정신이 물렁해서야.’
…그건 무슨 소리야. 나는 수전증을 멈추고자 주먹을 움켜쥐며 물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우리, 악마들의 무력을 키울 수 있는 힘. 그게 바로 감정이다. 물론 너는 아쉽게도 아직 악마가 아니지만.’
「버러지가! 감히 저분을 악마 따위와 동급으로 칭하지 마!」
‘너야말로 닥쳐, 머저리야. 나는 지금 나름대로 유용한 충고를 해주고 있는 거라고. 흔치 않게 나서서 도움을 주겠다는데도 난리야.’
「네 놈의 조언이 거짓일지 기만일지 모르는데 어떻게 믿겠어. 이 사기꾼!」
‘그래, 뭐…. 내가 거짓말을 많이 하는 건 인정. 이건 부정하지 않겠어. 그러니 정 의심이 간다면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들어.’
“.....”
능청스러운 어조로 메피스토가 말을 이었다.
‘지금의 네 육체가 퍽 편리하게 느껴지겠지. 그렇지? 하지만 그건 물리적인 피해에서 안전해진 것뿐이야. 너 같이 본질이 변화되어 인간에서 벗어난 존재들은 더욱 그렇지. 정신적인 면에 육신이 큰 영향을 받는다 이 말이다.’
...그 말은, 내가 물리적인 충격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을 때 육신에 무리가 갈수도 있다는 소리야?
‘역시 어느 머저리와는 다르게 머리쓰는 건 곧잘 하네. 맞아. 친애하는 그레트헨, 내가 분노의 악마라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그 덕에 나는 왕과 맞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힘을 지니게 되었으니, 너 또한 신중히 고르는 편이 좋을 거야.’
…잠깐, 무엇을?
‘네 정체성을 말이다. 쯧, 어느 감정이 네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하고 그것에 대비해라. 네 약점을 적에게 노출시키지 말라는 말이야. 호구새끼.’
「…….」
악마치고는 기대 이상으로 정석의 조언이었다. 루인 또한 그렇게 느꼈는지 얌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 꼬라지로 변하고 나서 너는 감정의 영향에 유독 많은 영향을 받고 있어. 며칠간 네가 기억하는 활동 시간이 얼마나 되지?’
…어?
왜 그걸 이제야 알았을까, 싶을 정도로 며칠간의 기억이 희미했다. 루인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나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괘, 괜찮아요. 굳이 알아봤자 좋을 것이 없습니다. 차라리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아니, 왜. 그렇게 말하니까 더 불안해지잖아.
‘그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 자식아, 그렇게 대처할수록 그레트헨의 상태가 더 무너지는 걸 여태까지의 경험으로도 깨닫지 못한 모양이지?’
[…나는, 그게.]
‘하여간에 미숙한 머저리 같으니. 용기가 없다면 내가 직접 말해주지. 그레트헨, 너는 틈만 나면 공황에 빠져서는 단검으로 제 목을 긁어댔다. 이젠 기억 나냐?’
“……!”
심장이 덜그럭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기사야, 무슨 일 있나?”
“…별 일 아니다.”
걱정 어린 질문에 무심히 답하며 티나지 않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그래. 나중엔 기어코 라텔을 꺼내려 드는 것을 내가 막았지.’
“…….”
라텔… 이라면, 투헨더를 말하는 건가. 메피스토는 이따금 투헨더를 그리 부르곤 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맨 정신에 필름이 끊기다니, 헛웃음만 나왔다. 하지만 어이없어 하기 전에 내 상태부터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게 먼저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들어보니 내 정신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여태까지는 치료받을 수 없어 외면하고 덮어두었으나, 지금은 몸이 정신에 꽤 많은 영향을 받는 상태였으니까.
…이제까지 와서 더 이상 외면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망각이라는 도피처가 끝장이 났군. 젠장맞을.
일단은 알겠어. 내 감정을 천천히 관조해보도록 노력하지.
‘…….’
순순히 내가 수긍하자 메피스토는 침묵을 지켰다. 꽤나 의외였거나, 아니면 별다른 첨언을 붙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내 반응에 만족한 모양이다.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보다 더욱 힘들었던 모양이다.
비극이 닥친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다. 그들은 우울과 부정을 반복하다가 마지못해 수용한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이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선고받은 이들 모두가.
이 두 가지에 전부 해당하는 나는 당연히 더욱 슬프고 힘들 것이다. 나는 이제 눅눅한 감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이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래. 이제 슬픔은 자연스레 내 곁에 머무는 친구와 같고, 가파른 절벽 같은 우울감은 내 동료나 마찬가지였으니.
아마 내가 죄수가 되어 형대에 오른다면, 밧줄은 세 개가 필요하리라.



